일제강점기와 해방 정국, 분단 이후 북한에 이르기까지 우리말과 글의 보존·체계화에 평생을 바친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 호는 고루.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나 중국 상하이 동제대학 예과와 독일 베를린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현 훔볼트대학)을 거치며 학문을 닦았고, 유학 시절 베를린대학에 유럽 최초의 조선어 강좌를 직접 개설해 무보수로 우리말을 가르친 인물.
1929년 귀국 후 조선어연구회(뒷날 조선어학회)에 합류해 간사장·회장을 맡으며 조선어사전 편찬, 한글 맞춤법 통일안·조선어 표준말 사정·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제정을 실무에서 이끈 한글 운동의 기획자이자 추진자.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의 가장 핵심 인사로 지목되어 함흥형무소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광복으로 출옥. 해방 후 재건된 조선어학회 회장으로 한글 연구를 다시 이끌며 《조선말 큰사전》 편찬 사업을 재개.
1948년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에 갔다가 북에 잔류하여, 이후 무임소상·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내고 1966년 이후 북한의 언어 규범화 운동인 문화어 운동을 주도. 분단으로 인해 남북 양쪽에서 오랫동안 온전히 조명받지 못했으나, 우리말의 과학적 연구와 보존에 남긴 자취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는 한글 운동의 대표적 인물. 2019년 영화 《말모이》의 주인공 류정환의 실제 모델로도 알려짐.
추가 정보
출생과 망명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 농가에서 출생. 전의 이씨 후손으로, 서당에서 한학을 익힌 뒤 마산 창신학교에서 수학.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1912년 서간도로 망명해 회인현 동창학교에서 윤세복을 만나 대종교에 귀의하고 교사로 활동하며 박은식 등 민족주의자들과 교유. 이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독일인이 운영하던 동제대학에서 서구 학문을 체계적으로 접함.
독일 유학과 조선어 강좌
1920년 상하이 동제대학 예과를 마친 뒤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현 훔볼트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 유학 중이던 1923년 이 대학에 유럽 최초의 조선어 강좌를 개설하고 무보수로 약 3년간 우리말을 가르쳤으며, 이광수의 《허생전》을 한글 교재로 만들어 활용. 1927년 5월 철학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같은 해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피압박민족반제국주의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가해 일제의 식민 통치를 국제 사회에 고발.
조선어학회와 한글 운동
1929년 1월 귀국해 조선어연구회에 합류,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고 사전 편찬을 실무에서 주도. 조선어학회 간사장·회장을 맡아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 1936년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1940년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제정을 이끎. 우리말 규범의 골격을 세운 핵심 추진자.
조선어학회 사건과 광복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서 최현배·이윤재와 함께 가장 핵심적인 인사로 지목되어 검거됨. 함흥재판소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45년 광복 이틀 뒤 출옥. 해방 후 재건된 조선어학회 회장으로 취임해 한글 연구를 다시 이끌며 《조선말 큰사전》 편찬 사업을 재개.
월북과 북한에서의 활동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했다가 북에 잔류. 같은 해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의 무임소상에 발탁되고, 이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 1966년 이후 북한의 언어 규범화 운동인 문화어 운동을 주도했고, 1978년 평양에서 사망해 애국렬사릉에 안장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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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사실들 3건
기록
조선어학회 간사장으로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1933), 표준어 사정(1936),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등 오늘날 한국어 어문 규범의 뼈대를 세우는 작업을 이끎.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된 회원 가운데 가장 무거운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함.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948년 월북 이후 남과 북 양쪽의 어문 정책에 모두 관여한 드문 국어학자로, 북한에서는 1966년 이후 '문화어운동'을 주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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