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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Ham Sok-hon

씨알사상을 제창하고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무교회주의 신앙과 반독재 민주화·인권 운동을 펼친 한국의 사상가이자 민중운동가, 종교인. 평안북도 용천 출생으로 평양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가담해 학업을 중단하고, 오산학교와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를 거치며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연구와 김교신 등과의 교류 속에서 신앙과 역사관의 토대를 형성한 인물.

동서양의 종교 전통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포용적·개방적 종교론을 전개하면서, 역사의 주체를 권력자가 아닌 민중, 곧 '씨알'에서 찾는 사상을 체계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다시 쓴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통해 고난을 통해 뜻을 실현하는 민족사 해석을 제시하고, 비폭력·평화·민주의 이념을 씨알사상으로 집약. 1956년부터 『사상계』에 시사평론을 발표하며 정치·사회 문제를 거침없이 비판하기 시작.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자유당 정권에 맞서 필화를 겪고, 1970년 『씨알의 소리』를 창간해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구심 역할 수행. 1979년과 1985년 미국 퀘이커봉사회의 추천으로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고, 2002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건국포장을 받음. 종교와 사상, 실천을 하나로 묶어 한국 현대사에서 양심과 비폭력 저항의 상징으로 평가받는 인물.

20 타임라인
2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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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타임라인 20건 · 1901–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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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2006년
일자 유형 내용 관련 엔티티 출처·정밀도
milestone 11건
1921 milestone 함석헌, 정주 오산학교에 편입 함석헌이 1921년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함. 재학 중 안창호·이승훈·조만식에게서 민족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고, 유영모를 만나 신앙과 사상 형성의 중요한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파악.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유학으로 나아감. 오산학교 출처 2 · 연1924 ~ 1928 milestone 함석헌, 동경고등사범학교 유학 중 무교회주의 신앙 수용 함석헌이 1924년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 제1부에 입학해 1928년 졸업함. 재학 중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연구에 깊은 영향을 받고, 김교신·송두용·정상훈 등과 교류하며 무교회주의 신앙을 받아들임. 제도 교회보다 성서 읽기와 개인의 신앙적 결단을 중시하는 관점이 이후 그의 종교사상과 사회 참여의 중요한 토대가 됨. 우치무라 간조, 김교신 출처 1 · 연1928-04 ~ 1938-03 milestone 함석헌, 오산학교 교사로 재직 함석헌이 1928년 4월 귀국해 모교인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하고, 1938년 3월 사임할 때까지 역사와 수신을 가르침. 재직 중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신앙을 함께 가르치며 교육자로 활동함. 오산학교 출처 2 · 월1958-08-08 milestone 함석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필화로 구속 함석헌이 『사상계』 1958년 8월호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6·25전쟁이 주는 역사적 교훈」을 발표함. 글은 한국전쟁을 미·소 냉전 질서 속의 비극으로 바라보고, 반공·북진통일 구호 아래 비판을 억누르던 이승만 정권의 정치 환경을 비판함. 경찰은 8월 8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함석헌을 구속하고, 『사상계』 발행인 장준하와 주간 안병욱도 연행해 조사함. 함석헌은 8월 25일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됨. 자유당의 국가보안법 개정 추진과 맞물려 벌어진 대표적 필화 사건으로, 『사상계』가 권위주의 정권 비판의 공론장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 계기. 장준하, 사상계 출처 21960-04 milestone 『사상계』, 4·19 혁명 전후 민주주의 담론의 주요 공론장으로 부상 『사상계』는 함석헌·천관우 등 비판적 지식인의 글을 통해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 권위주의 통치, 분단 현실과 민주주의의 과제를 꾸준히 다룸. 이러한 논의는 학생·지식인층 사이에서 자유와 민주주의, 정치 참여의 필요성을 성찰하는 지적 토대를 형성함. 4·19 혁명 뒤에는 학생과 시민의 저항을 민주혁명으로 해석하고, 새 민주정치의 방향과 장면정부의 과제를 비판적으로 논의하는 지면을 마련함. 『사상계』가 혁명을 직접 조직한 주체는 아니었으나, 4·19 전후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담론을 형성하고 확산한 대표적 종합교양지 가운데 하나로 평가됨. 사상계 출처 2 · 월1961-07 milestone 『사상계』, 함석헌 「5·16을 어떻게 볼까」 게재 『사상계』 1961년 7월호가 함석헌의 「5·16을 어떻게 볼까」를 게재함. 함석헌은 민중의 동의와 참여 없이 이뤄진 군사정변은 참된 혁명이 될 수 없다고 비판하고, 독재와 권력 남용의 위험을 지적함. 글을 게재한 뒤 발행인 장준하는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에게 끌려가 글을 실은 경위를 심문받음. 글이 실린 같은 시기 『사상계』 6월호 권두언은 5·16을 4·19 혁명의 과업을 수행할 가능성이 있는 군사혁명으로 평가한 반면 (해당 권두언은 편집장 장준하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짐), 함석헌은 민중의 동의 없는 군사정변은 참된 혁명이 될 수 없다고 비판함. 장준하, 5·16 군사정변+1 출처 2 · 월1962 milestone 함석헌, 미국 방문 중 퀘이커와 교류 함석헌이 1962년 미국 국무성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함. 방문 중 퀘이커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퀘이커 학교에서 공부함. 출처 2 · 연1976-03-01 milestone 재야 인사들, 명동성당 3·1절 미사서 민주구국선언 발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소속 사제 20여 명이 공동 집전한 명동성당 3·1절 기념미사에서 재야 인사들이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함. 이우정이 선언문을 낭독하고 윤보선·김대중·함석헌·정일형·문동환 등 10명이 서명함. 선언은 긴급조치 철폐와 민주주의 회복, 사법권 독립, 경제적 자립, 평화적 민족통일 등을 요구하며 유신체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함. 정부는 관련자들을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기소했으며 사제단 소속 함세웅·신현봉·문정현·김승훈 등도 재판을 받음. 종교계와 정치·재야 세력이 결합한 유신체제 후반기의 대표적인 민주화운동으로 발전함. 윤보선, 명동성당+3 출처 31979 milestone 미국 퀘이커봉사회, 함석헌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 미국 퀘이커봉사회(AFSC)가 함석헌을 1979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함. 1947년 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단체인 AFSC가 행사한 추천으로, 1985년에도 함석헌을 다시 추천함. 한국의 비폭력·민주화 운동가가 국제 평화운동의 추천을 받은 사례. 추천 자체는 노벨위원회의 지지나 수상자 선정과 구별되는 절차이며, 함석헌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지 않음. 미국 퀘이커봉사회, 노벨평화상 출처 1 · 연2002-08-15 milestone 함석헌,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건국포장 추서 대한민국 정부가 광복절 57주년 기념식에서 함석헌에게 건국포장을 추서. 정부는 일제강점기 언론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한 공적을 인정해 독립유공자로 포상. 건국포장 출처 22006-10-19 milestone 함석헌,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 함석헌의 유해가 2006년 10월 19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에 안장됨. 경기도 연천군 전곡면에 있던 묘소에서 이장된 것으로, 독립유공자 묘역 329호에 안장됨. 국립대전현충원 출처 3
event 4건
1919 event 함석헌, 3·1운동 참여 후 평양고보에서 퇴학 함석헌이 평양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함. 일제 학교 당국이 반성문을 쓰면 복학시켜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이를 거부해 퇴학당한 것으로 전해짐. 이후 약 2년간 수리조합 사무원과 소학교 교사로 일한 뒤 오산학교로 진학함. 3·1운동 출처 2 · 연1927-02 event 함석헌, 무교회주의 동인지 『성서조선』 창간에 참여 함석헌이 1927년 2월 김교신·송두용·류석동·정상훈·양인성과 함께 무교회주의 동인지 『성서조선』 창간에 참여함. 『성서조선』은 성서 해석을 바탕으로 신앙·교육·민족 문제를 다룬 매체로, 이후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1942년 폐간될 때까지 발행됨. 성서조선, 김교신 출처 2 · 월1940 event 함석헌, 계우회사건 연루로 1년간 구류 함석헌이 1940년 평안남도 대동군 송산리에서 김혁이 운영하던 송산농사학원을 경영하던 중 계우회사건에 연루됨. 대동경찰서에서 약 1년간 구류 생활을 함. 이후 1942년 『성서조선』 필화사건으로 다시 1년간 미결수로 복역하게 되는 일제 말기 탄압의 전조가 된 사건. 출처 1 · 연1942 event 함석헌, 『성서조선』 필화사건으로 1년간 미결수 복역 함석헌이 『성서조선』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경찰서에서 1년간 미결수로 복역함. 이 사건으로 김교신·함석헌 등 『성서조선』 관계자들이 검거되었고, 잡지는 강제로 폐간됨. 성서조선 출처 2 · 연
release 2건
1962 release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발간 함석헌이 1962년 일우사에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발간함. 이 책은 1930년대 『성서조선』에 연재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바탕으로 개정·증보한 한국사 저술임. 뜻으로 본 한국역사 출처 2 · 연1970-04 release 함석헌, 교양·평론지 『씨알의 소리』 창간 함석헌이 1970년 4월 교양·평론 잡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고 발행인을 맡음. 잡지는 민주주의 발전을 표방하며 시사·사회·사상 문제를 다뤘고, 한글 전용 가로쓰기와 구어체 표현을 사용해 일반 독자가 읽기 쉽게 구성됨. 창간호와 5월호 발행 뒤 문화공보부의 등록취소처분을 받음. 씨알의 소리, 씨알사상 출처 2 · 월
start 1건
1901-03-13 start 함석헌, 평안북도 용천에서 출생 함석헌이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에서 함형택과 김형도의 아들로 태어남. 당숙 함일형이 세운 삼천재에서 한학을 배우고, 1914년 덕일학교를 졸업하며 신학문 교육을 받기 시작함. 출처 2
change 1건
1947-03 change 함석헌, 월남 후 YMCA에서 성서강해 계속 함석헌이 1947년 3월 월남한 뒤 서울 YMCA에서 성서강해를 계속함. 출처 1 · 월
end 1건
1989-02-04 end 함석헌 사망 함석헌이 1989년 2월 4일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별세함. 향년 87세. 사상가·교육자·종교인으로 활동하며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고 민주화운동과 평화운동에 참여함. 출처 2

그 외 사실들 2건

기록

  • 함석헌의 주요 저서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1948), 『인간혁명』(1961), 『역사와 민족』(1964), 『뜻으로 본 한국역사』(1967), 『통일의 길』(1984)이 있고, 주요 시집으로 『수평선 너머』(1953)가 있음.

  • 함석헌은 2002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받았으며, 2006년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됨.

갱신 2026-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