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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우사)

金奎植zh·尤史zh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정치인·교육자·학자로, 아호는 우사(尤史), 교명은 요한(Johann).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신한청년당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파견되어 한국 독립을 국제사회에 호소한 외교 독립운동의 대표적 인물. 유창한 영어와 서구 학문을 바탕으로 임시정부 외무총장·구미위원부 위원장·학무총장·선전부장·부주석 등을 맡으며 독립운동의 국제 외교와 대외 선전을 담당.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 미국 로어노크대학과 프린스턴대학원에서 수학하며 신학문을 익힘.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한 뒤 신한청년당·대한민국 임시정부·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민족혁명당 등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 세력의 대동단결과 통일전선 구축을 추구.

광복 후에는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이끌고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과 민족자주연맹 위원장을 역임. 1948년 김구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해 남북한의 단독정부 수립과 분단을 막고 통일정부를 세우려 노력. 한국전쟁 중 북한군에 납북되어 1950년 만포진 부근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짐.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북한은 1990년 조국통일상을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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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우사)

추가 정보

출생과 성장

1881년 1월 29일 부산 동래에서 김지성의 아들로 태어남. 본관은 청풍(淸風), 아호는 우사(尤史). 아버지가 상소 문제로 유배되고 어린 나이에 어머니마저 여의면서 친척들의 집을 전전함. 이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하며 요한이라는 교명을 받음.

유학과 귀국

1897년 미국으로 건너가 버지니아주 로어노크대학에서 수학하고 1903년 졸업. 이어 프린스턴대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해 1904년 석사학위를 취득함. 귀국 후 언더우드의 비서, YMCA학교 교사, 경신학교 학감, 연희전문학교 강사 등으로 활동하며 교육과 기독교계 활동에 종사. 새문안교회 장로와 장로회 서기 등을 맡아 초기 한국 개신교계에서도 활동함.

중국 망명과 외교 독립운동

일제의 교회 탄압과 감시가 강화되자 1913년 중국으로 망명. 상하이와 화북·몽골 등지에서 교육과 상업에 종사하며 해외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함. 1918년 신한청년당에 참여하고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할 한국 대표로 선정됨.

1919년 3월 파리에 도착해 평화회의 한국민대표관과 파리한국통신부를 설치하고 독립 외교에 착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외무총장 겸 파리 주재위원으로 선임되어 「한국 독립에 관한 청원서」와 「한국 독립 항고서」를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함. 『한국 독립과 평화』를 비롯한 홍보물을 각국 대표단과 언론에 배포하며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알림.

같은 해 미국으로 건너가 구미위원부 초대 위원장을 맡아 미국 정부와 정치인들을 상대로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고 독립자금을 모집함. 이후 임시정부 학무총장 등을 역임했으며, 1922년 모스크바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조선대표단 집행위원장으로 참가해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호소함.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 추진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서 기존 임시정부를 대신할 새로운 독립운동 지도기관을 세우자는 창조파에 참여함. 이후에도 분열된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추진하여 1932년 한국광복동지회 대표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에 참여함.

1935년 여러 독립운동 정당·단체가 통합한 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해 중앙집행위원과 국민부장을 맡음. 1942년 민족혁명당 계열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임되고, 1943년 선전부장과 조선민족혁명당 주석을 맡음. 1944년 임시정부 부주석에 취임해 김구 주석과 함께 좌우 독립운동 세력이 참여한 통합 임시정부 지도부의 한 축을 담당함.

광복과 좌우합작운동

1945년 11월 23일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환국. 처음에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참여했으나 이후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의 핵심이 통일 임시정부 수립에 있다고 판단하고, 좌우 세력의 합작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모색함.

1946년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위원회 발족을 주도하고 우익 측 대표를 맡음. 같은 해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으로 선출되어 좌우합작운동의 제도화를 추진했으나, 냉전의 심화와 미소공동위원회 결렬로 좌우합작운동은 성과를 거두지 못함. 1947년 중도 정치세력을 결집한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고 위원장에 취임함.

남북협상과 통일운동

유엔이 선거 가능한 지역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자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함. 1948년 4월 민족자주연맹 대표단을 이끌고 평양을 방문해 김구 등과 함께 남북 지도자 회담에 참여함. 남북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막고 통일정부를 구성하려 했으나 구체적인 합의에는 이르지 못함.

서울로 돌아온 뒤 5·10 총선거에 대해 ‘불반대·불참가’ 입장을 밝히고 선거에 참여하지 않음. 같은 해 7월 김구와 함께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해 남북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통일운동을 이어감. 이후에도 제도권 정치 참여를 피하면서 민족자주연맹 등을 중심으로 평화적 통일 방안을 모색함.

납북과 사망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서울에 남아 있다가 9월 북한군에 납북됨. 북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지병과 열악한 환경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그해 12월 10일 평안북도 만포진 부근 별오동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짐.

평가와 추모

외교 능력과 국제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독립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렸으며,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좌우합작에 기여함. 광복 후에는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통해 분단을 막고 통일정부를 수립하려 한 중도 통합세력의 대표적 지도자로 평가됨.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운동 공적을 기려 1989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함. 북한도 1990년 조국통일상을 추서해 남북협상과 통일운동에 참여한 행적을 기림.

타임라인 33건 · 1881–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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