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회유와 감시, 국내 민족운동에 대한 탄압을 피해 1913년 4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 쑨원을 비롯한 중국 혁명가들과 교류하며 중국 2차 혁명에 참여하고, 이듬해 신규식과 함께 박달학원을 설립해 한인 청년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등 해외 독립운동에 나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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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귀국한 뒤 언더우드의 비서로 일하는 한편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교사·학관장·학생부 간사 등으로 활동하고 경신학교 교사와 교감을 역임. 1910년 새문안교회 장로로 선출되고, 1911년 경기·충청도 장로교연합회 서기, 1912년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을 맡는 등 교육계와 개신교계에서 활동. 1913년 4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면서 국내 활동을 마무리함.
1897년 미국으로 유학해 1903년까지 버지니아주의 로어노크대학에서 수학하고, 이듬해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귀국. 미국 유학을 통해 쌓은 영어 능력과 서구 학문에 대한 이해는 훗날 국제 외교 무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 활용됨.
아버지가 귀양 간 데 이어 어머니마저 사망하면서 6세에 고아가 됨.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보살핌 아래 성장하며 요한이라는 교명을 받고 서구식 교육과 기독교 신앙을 접함.
조선 경상도 동래에서 출생. 훗날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좌우합작운동·남북협상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정치인·외교가로 활동. (~1950년)
우버가 독일의 글로벌 배달 플랫폼 기업 딜리버리히어로를 기업가치 148억 달러에 인수하기 위한 기업결합 계약과 공개매수 계획을 발표함. 딜리버리히어로 주주에게 주당 41.50유로를 현금으로 지급하는 조건으로, 우버가 이미 매입한 지분을 반영한 추가 인수 금액은 약 137억 달러 규모.
인수 대상에는 한국의 배달의민족을 비롯해 아시아의 푸드판다, 중동의 탈라밧, 중남미의 페디도스야 등 50개 시장의 사업이 포함됨. 거래가 성사되면 양사의 이동·배달 플랫폼은 모두 99개 시장에 걸쳐 운영되며, 우버가 이동 서비스와 배달 서비스를 함께 제공하는 시장도 34개에서 58개로 확대될 전망.
우버이츠와 딜리버리히어로의 사업이 중복되는 스페인·폴란드·스웨덴·튀르키예 등 14개 시장의 사업은 경쟁 규제에 대비해 투자회사 SSW 파트너스가 약 16억 달러에 별도로 인수하기로 합의함. 본 거래는 딜리버리히어로 발행주식의 50%+1주 이상 확보와 각국 경쟁 당국의 승인 등을 조건으로 하며, 2027년 하반기 완료 예정.
신흥강습소 교장 여준과 제1회 졸업생 김석·강일수·이근호 등이 1913년 5월 6일 통화현 합니하에서 신흥교우단을 결성. 교직원·졸업생·재학생을 아우르며 군사 학술 연마와 독립사상 선전, 한인 마을 교육 활동을 추진. 뒤에 신흥학우단으로 개칭되면서 신흥학교 관계자 네트워크가 독립운동 조직으로 확장.
합니하(哈泥河) 본관 낙성 뒤 학교 체제를 정비하며 신흥중학교로 개칭. 중학반과 군사반을 함께 두고 일반 교육과 군사교육을 병행.
이후 중학반을 폐지해 지방 중학교에 인계하고 군사반 중심으로 운영 전환. 독립군 간부 양성에 집중하는 교육기관으로 성격 강화.
2017년 11월 24일 대한민국 국회가 매년 8월 14일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정하는 법률 개정안을 의결함. 김학순이 국내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실명 공개 증언한 1991년 8월 14일을 기념한 날짜.
법률에 따라 2018년부터 피해자 기림의 날이 국가기념일로 시행됨. 김학순의 공개 증언이 피해생존자들의 명예 회복과 역사교육을 위한 국가적 기억의 날로 제도화된 결과.
아사히신문, 일본군의 위안소 관여 입증하는 공문서 보도
1992년 1월 11일 아사히신문이 역사학자 요시미 요시아키가 일본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발견한 일본군 ‘위안부’ 관련 공문서를 보도함. 일본군이 위안소의 설치와 운영, 여성 모집과 감독에 관여했음을 보여주는 자료의 확인.
김학순의 공개 증언과 소송 제기 이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뒷받침하는 공문서가 언론을 통해 제시된 결정적 사건. 일본 정부가 군 관여를 부인하던 기존 입장을 재검토하고 관련 자료를 조사하게 만드는 계기가 됨.
1991년 12월 9일 김학순이 일본 도쿄 한국YMCA에서 열린 ‘김학순 씨의 이야기를 듣는 모임’에 참석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증언함. 수용 인원 300명의 강당에 약 600명의 청중이 모인 증언회.
일본군 ‘위안부’ 피해생존자가 가해국 일본에서 직접 피해 사실을 증언하고 일본 정부의 책임을 고발한 첫 사례. 김학순은 같은 달 오사카·고베·도쿄·사카이 등을 돌며 증언 활동을 이어감.
정대협, 김학순 증언 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신고전화 개설
1991년 9월 18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이른바 ‘정신대 신고전화’를 개설함. 김학순의 공개 증언 이후 다른 피해생존자들의 증언과 피해 신고를 접수하기 위해 마련한 창구.
신고전화를 통한 피해 사실의 수집은 개별 증언을 집단적인 피해 조사로 확장하는 계기가 됨. 1992년 2월 29일까지 정대협에 접수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신고자는 70명이며, 이 가운데 당시 생존자는 41명으로 집계됨.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제1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참가 단체들이 매년 8월 14일을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로 정하는 결의를 채택함. 국내에서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실명으로 공개 증언한 김학순의 용기와 피해생존자들의 인권운동을 기리기 위한 결정.
이후 피해국과 여러 지역의 시민단체들이 매년 8월 14일 공동행동과 추모·연대 행사를 개최함. 첫 세계 기림일인 2013년 8월 14일에는 여러 국가와 도시에서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요구하는 행사가 동시에 열림.
대한민국에서는 2017년 관련 법률 개정을 통해 8월 14일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라는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고, 2018년부터 정부 주관 기념식을 개최함.
김학순이 평생 모은 재산을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용해 달라며 서울 동대문감리교회에 기부함. 기부액은 자료에 따라 약 1,700만 원 또는 2,000여만 원으로 기록됨.
김학순은 임종을 앞두고 일본 정부의 진심 어린 사죄를 받아 달라는 뜻을 남김. 공개 증언 이후 일본 정부에 사실 인정과 사죄·배상을 요구해 온 여성인권운동가로서의 뜻을 마지막까지 이어간 행보.
김학순이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소송’ 제9회 구두변론에 출석해 원고 본인신문을 받음. 후쿠시마 미즈호 변호사의 신문을 통해 성장 과정과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어 겪은 피해를 직접 증언함.
1991년 공개 증언과 소송 제기에 이어 가해국의 법정에서 피해 경험과 일본 정부의 책임을 직접 진술한 사건. 김학순의 증언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공식적인 재판 기록으로 남기고 국가의 법적 책임을 추궁하는 근거가 됨.
고노 요헤이 일본 관방장관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정부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이른바 ‘고노 담화’를 발표함. 담화는 위안소의 설치·관리와 여성들의 이송에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으며, 모집 과정에서도 감언·강압 등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사례가 많았고 관헌이 직접 가담한 사례도 있었다고 인정함.
고노 장관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에 사죄와 반성의 뜻을 밝히고, 역사 연구와 교육을 통해 문제를 기억하겠다고 표명함. 김학순을 비롯한 피해생존자들의 공개 증언과 법적 투쟁, 군 관여 자료의 발견과 시민사회의 진상규명 요구가 일본 정부의 기존 부인 입장을 바꾸는 데 영향을 미친 결과.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대한 군과 관헌의 관여, 모집 과정의 강제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사죄한 핵심 문서. 다만 법적 책임이나 국가배상 의무를 인정한 것은 아니어서 이후에도 책임 인정과 배상을 둘러싼 논쟁이 계속됨.
김학순이 한국여성단체연합이 개최한 한국여성대회에서 ‘올해의 여성상’을 수상함.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실명으로 공개 증언하고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한 용기와 활동을 한국 여성운동계가 공식적으로 기린 상훈.
김학순을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침묵을 깨고 사회적 변화를 이끈 여성인권운동가로 조명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여성인권 의제로 확장한 활동의 의미를 확인한 계기.
김학순을 비롯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강제동원 피해자·유족 등 35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소송’을 도쿄지방재판소에 제기함. 김학순을 포함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생존자 세 명이 원고단에 참여함.
김학순의 공개 증언이 피해 사실의 고발을 넘어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묻는 소송으로 이어진 사건. 일본군 ‘위안부’ 피해생존자가 일본 법정에서 국가의 책임과 피해 배상을 요구하는 법적 투쟁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됨.
김학순이 서울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내 거주 일본군 ‘위안부’ 피해생존자로서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며 피해 사실을 증언함.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위안소에서 겪은 피해를 밝히고 일본 정부에 사실 인정과 사죄를 요구함.
김학순의 증언은 사회적 낙인과 침묵에 가려져 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공적인 역사 문제이자 여성인권 문제로 드러낸 결정적 전환점. 이후 다른 피해생존자들의 신고와 공개 증언,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배상 청구 소송과 국제적 연대 활동으로 이어짐.
이날은 김학순의 증언을 기려 2012년 제1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로 정해졌으며, 대한민국에서는 2017년 법정 국가기념일로 지정됨.
일본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모토오카 쇼지 사회당 의원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상조사를 요구하자, 시미즈 쓰타오 노동성 직업안정국장이 군과 관계없는 민간업자들이 ‘위안부’를 데리고 다닌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며 정부 차원의 조사가 어렵다고 답변함.
일본 정부와 군의 관여를 부인하고 책임을 민간업자에게 돌린 공식 답변. 일본군에 의해 직접 끌려가 피해를 입었던 김학순은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살아 있는데도 일본 정부가 사실을 부인하는 데 분노하여 공개 증언을 결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