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일본 제국 대표단이 국제연맹 규약에 인종·국적에 따른 차별 없는 대우 원칙을 명문화하자고 제출한 수정안. 일본어로는 인종적 차별 철폐 제안(人種的差別撤廃提案) 등으로 불리며, 서구 열강이 주도하던 국제질서에서 인종에 따른 차별 문제를 국제기구의 기본 원칙으로 제기한 초기의 주목할 만한 국가 간 시도.
1919년 2월 13일 전권위원 마키노 노부아키가 국제연맹 규약 위원회에 규약 제21조 수정안으로 처음 제출. 조문은 국가의 평등을 국제연맹의 기본 원칙으로 전제하고, 연맹 회원국 국민인 외국인에게 인종이나 국적을 이유로 법률상·사실상의 차별을 두지 않은 평등하고 공정한 대우를 가능한 한 빨리 부여하도록 규정함. 일본에게는 서구 열강과 대등한 강대국으로 인정받으려는 요구이자 미국과 영국 자치령에서 겪던 일본인 이민 차별 문제를 국제적으로 제기할 수 있는 외교적 수단이라는 의미가 있었음.
그러나 명칭과 달리 모든 인종과 민족의 보편적 평등이나 식민지 지배의 철폐를 요구한 제안은 아니었음. 적용 대상은 기본적으로 국제연맹 회원국의 국민이 다른 회원국에서 외국인으로 생활할 때 받는 대우였으며, 일본 제국의 지배를 받던 조선인 등 식민지 주민의 정치적 평등이나 민족자결은 포함하지 않음. 일본이 서구에 대해서는 인종적 위계와 차별의 철폐를 요구하면서 제국 내부에서는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와 차별적 통치를 유지했다는 근본적인 모순이 존재.
이 역설은 같은 1919년에 더욱 선명하게 드러남. 일본 대표단이 파리에서 인종적 차별 없는 대우를 주장하던 동안 조선에서는 3·1 운동이 일어났으며, 김규식 등 한국 독립운동가들도 파리에 대표를 보내 민족자결과 독립을 호소함. 그러나 한국의 독립 요구는 강화회의의 공식 의제로 받아들여지지 않음. 일본의 제안은 서구 중심 국제질서의 인종적 위계에 도전하는 성격과 동시에 그 평등의 범위를 일본과 일본 국민에게 유리한 수준으로 한정한 제국주의적 한계를 함께 지닌 사건.
4월 11일 국제연맹 규약 위원회 최종 회의에서 일본은 규약 전문에 국가의 평등과 그 국민에 대한 공정한 대우 원칙을 넣는 완화된 수정안을 제출함. 일본 외무성 기록상 출석자 16명 가운데 11명의 찬성을 얻었으나, 의장이던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강한 이견이 존재하는 중요 사안에는 만장일치가 필요하다고 판정하면서 채택되지 못함. 백호주의를 유지하려 한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빌리 휴즈의 강경한 반대와 미국 내 일본인 이민을 둘러싼 반대 여론 등이 주요 배경으로 작용.
제안의 실패는 서구 중심 국제질서에 존재하던 인종적 위계를 드러내고 일본 내 대서구 불신을 키운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됨. 한편 인종 등에 따른 차별 없는 권리는 이 제안의 직접적인 계승이라기보다 별도의 역사적 과정을 거쳐 1945년 국제연합 헌장, 1948년 세계인권선언, 1965년 인종차별철폐협약 등 전후 국제인권 체계에서 보다 보편적인 원칙으로 발전함.
추가 정보
배경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이자 파리 강화 회의의 주요 참가국이 된 일본에는 서구 열강과 대등한 국제적 지위를 확인받으려는 외교적 과제가 존재. 러일전쟁 승리와 영일동맹 등을 거치며 강대국의 지위를 확보했지만, 서구 중심 국제질서에서는 여전히 인종적 위계와 차별에 직면한 상황.
1907~1908년 미일 신사협정에 따른 일본인 노동자의 미국 이민 제한, 캘리포니아 외국인 토지법, 오스트레일리아의 백호주의 등 일본인의 이민과 권리를 제약한 정책도 일본 정부가 국제연맹 규약에 평등 원칙을 넣으려 한 주요 배경. 특히 미국 서부와 영국 자치령의 일본인 배척 문제는 일본이 강대국으로 인정받았음에도 국민은 인종을 이유로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불만을 키움.
하라 다카시 내각은 국제연맹 참여를 지지했으나 정부와 여론 내부의 회의론에도 직면한 상황. 인종 평등 제안에는 국제연맹 참여의 국내 정치적 명분을 강화하고, 미국·영국 자치령에서 일본인이 겪던 차별 문제를 국제적인 원칙의 문제로 전환하려는 목적이 함께 존재.
제안과 심의 경과
1919년 2월 13일 국제연맹 규약 위원회에서 마키노 노부아키가 규약 제21조에 인종 평등 수정안을 제출함. 국가의 평등을 국제연맹의 기본 원칙으로 전제하고, 연맹 회원국 국민인 외국인에게 인종이나 국적을 이유로 법률상·사실상의 차별을 두지 않은 평등하고 공정한 대우를 부여하자는 내용.
2월 14일 본회의에 해당 조항이 빠진 규약 초안이 보고되자 마키노가 국제연맹 창설에 협력하겠다는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일본 측 제안을 후속 논의에서 다시 제출하겠다는 방침을 밝힘.
4월 11일 국제연맹 규약 위원회 최종 회의에서 마키노가 규약 전문에 '국가의 평등과 그 국민에 대한 공정한 대우' 원칙을 포함시키는 완화된 수정안을 제출함. 일본 외무성 기록상 출석자 16명 가운데 11명이 찬성했으나, 의장 우드로 윌슨이 강한 반대가 존재하는 중요 사안에는 만장일치가 필요하다고 판정하면서 수정안이 채택되지 못함. 다수의 찬성표가 있었다는 사실과 일본 측의 입장은 회의 기록에 남겨짐.
4월 28일 파리 강화 회의 본회의에서 마키노가 제안의 경과를 설명하고 일본 정부와 국민의 유감을 표명함. 일본은 이 자리에서 즉각적인 채택을 강행하지 않으면서도 인종적 차별 문제의 해결을 계속 주장하겠다는 입장을 밝힘. 같은 날 인종 평등 조항이 포함되지 않은 국제연맹 규약이 본회의에서 채택됨.
제안의 역설과 한계
통상 '인종 평등 제안'으로 불리지만 오늘날 의미의 보편적 인종차별 철폐 원칙과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 최초안은 국제연맹 회원국 국민이 다른 회원국에서 외국인으로 생활할 때 인종이나 국적에 따라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으로, 식민지 주민 전체의 평등이나 피지배 민족의 자결권을 보장하려는 제안은 아니었음.
따라서 일본이 서구의 인종주의적 국제질서에는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자신의 제국주의와 식민지 지배에는 같은 원칙을 적용하지 않았다는 근본적인 모순이 존재. 일본은 서구 열강에 일본과 일본인을 동등하게 대우할 것을 요구했지만, 당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으며 조선인에게는 정치적 자결권이 인정되지 않고 동화정책과 차별적 식민 통치가 시행되고 있었음. 제안이 추구한 평등은 모든 민족을 동등하게 만들기보다는 일본이라는 비서구 강대국이 서구 강대국과 동등한 지위를 확보하려는 요구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었음.
이러한 모순은 1919년이라는 시점에서 특히 두드러짐. 일본 대표단이 파리에서 인종에 따른 차별 없는 대우를 요구한 지 불과 보름여 뒤인 3월 1일 조선에서는 독립과 민족자결을 요구하는 3·1 운동이 시작됨. 신한청년당이 파견한 김규식도 3월 13일 파리에 도착해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고,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 자격으로 활동함. 그러나 한국의 독립 요구는 파리 강화 회의의 공식 의제로 채택되지 못함.
따라서 인종 평등 제안은 서로 모순되는 두 역사적 의미를 동시에 지닌 사건으로 이해할 필요. 한편으로는 백인 중심 국제질서와 서구 국가들의 인종차별적 이민정책에 비서구 국가가 공개적으로 도전한 사건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원칙을 자신의 식민지 주민에게까지 적용하지 않은 일본 제국주의의 선택적 평등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함.
반대와 채택 실패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빌리 휴즈는 제안이 백호주의와 자국의 이민 통제 권한을 위협할 가능성을 우려해 강하게 반대하고 영국 제국 대표단 내부에서도 반대 입장을 주도함. 미국 역시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한 일본인 이민 반대 여론과 국내 인종정책을 둘러싼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었음.
국제연맹 창설을 우선한 윌슨은 4월 11일 위원회 의장으로서 강한 이견이 존재하는 사안에는 만장일치가 필요하다고 판정함. 일본 측 수정안은 다수의 지지를 얻었음에도 국제연맹 규약에 포함되지 못함. 제안의 실패는 일본의 목적이나 한계와 별개로, 당시 서구 중심 국제질서가 인종적 평등이라는 원칙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명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줌.
후속 영향과 평가
같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는 산둥의 옛 독일 권리와 이권을 일본이 승계하는 조항도 확정됨. 인종 평등 제안의 포기와 산둥 문제의 해결을 단순한 교환이나 보상 관계로 단정하기보다 각각의 협상 과정과 일본 대표단의 외교적 이해관계를 구분해 이해할 필요.
제안의 실패는 일본에서 서구 중심 국제질서에 대한 불신과 대미·대영 반감을 키운 요인 가운데 하나로 평가됨. 그러나 이를 이후 일본의 군국주의나 태평양 전쟁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단일한 원인으로 설명하는 것 역시 지나친 단순화. 일본의 대외정책 변화에는 국내 정치, 경제, 중국 침략, 군부의 성장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함.
인종에 따른 차별 없는 권리라는 원칙은 이후 별도의 역사적 과정을 통해 훨씬 보편적인 국제인권 규범으로 발전함. 1945년 국제연합 헌장이 인종 등에 따른 차별 없이 인권과 기본적 자유를 존중한다는 원칙을 명시하고, 1948년 세계인권선언은 모든 인간의 존엄과 평등, 인종·피부색 등에 따른 차별 없는 권리 향유를 선언함. 1965년에는 인종차별철폐협약이 채택되면서 인종차별 철폐 의무가 구속력 있는 국제조약으로 구체화됨.
1919년 일본의 제안과 이러한 전후 인권규범 사이에 직접적인 계승 관계가 존재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움. 다만 인종적 위계가 국제질서의 제도와 이민정책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시대에 그 문제를 국제회의의 공식 의제로 드러냈다는 점, 그리고 동시에 평등을 요구한 일본 자신도 제국 내부에서는 식민지적 위계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20세기 초 국제질서가 지닌 모순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
그 외 사실들 4건
기록
1919년 2월 13일 제출된 수정안 원문은 국가의 평등이 국제연맹의 기본 원칙임에 비추어, 체약국은 연맹 회원국의 국민인 모든 외국인에게 인종이나 국적을 이유로 법률상으로든 사실상으로든 차별을 두지 않고 모든 면에서 평등하고 공정한 대우를 가능한 한 빨리 부여할 것에 동의한다는 내용.
1919년 4월 11일 국제연맹 규약 위원회 최종 회의에서 출석 위원 16명 가운데 11명이 일본의 수정안에 찬성했으나, 의장 우드로 윌슨이 중요한 사안에는 만장일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채택되지 못한 결과.
발언
마키노 노부아키는 1919년 4월 28일 본회의에서 일본 정부와 국민이 오랜 불만의 조정을 지향하는 원칙을 세우자는 정당한 요구를 위원회가 승인하지 않은 데 대해 통절한 유감을 느낀다고 발언하며, 이 요구를 앞으로도 계속 주장하겠다고 선언.
논란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빌리 휴즈는 인종 평등 조항이 이민제한법에 담긴 백호주의를 위협한다고 보고 국제연맹 규약에서 이 조항을 빼내는 데 앞장섰으며,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사회에서 이 입장은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는 평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