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근위대가 플랑드르 연대 장교들을 환영하는 연회를 베르사유 오페라 극장에서 개최함. 왕당파의 노래와 왕실에 대한 충성이 강조된 자리였으며, 뒤이어 혁명의 삼색 표장이 짓밟혔다는 소문이 파리에 퍼짐. 식량난 속 궁정의 연회는 시민의 분노를 키웠지만, 소문의 모든 내용을 확인된 사실처럼 받아들여서는 안 됨.
현재 9건 표시
01 · 목
02 · 금
국민의회 의장 장조제프 무니에가 의회에서 채택한 법령에 대한 국왕의 승인을 요청했으나 루이 16세가 거부함. 민생을 둘러싼 불만과 별개로 혁명기의 새로운 권리와 헌정질서를 국왕이 받아들일 것인지도 쟁점이었음. 며칠 뒤 여성 대표단의 식량 요구와 의회의 정치적 요구가 같은 장소에서 교차하게 됨.
05 · 월
파리 여성들, 빵을 요구하며 베르사유로 행진
파리 시장과 노동자 거주지의 여성들이 시청 앞 그레브 광장 등지에 모여 식량 공급을 요구하고 베르사유로 향함. 비를 맞으며 수 시간 걸어간 행렬에는 남성들도 합류했으며 일부는 대포를 끌고 이동함. 생계를 책임지던 여성들이 왕과 의회에 직접 요구를 전달하기 위해 도시 사이의 거리를 넘어선 집단행동이었음.
베르사유에 도착한 여성 일부가 국민의회를 찾아갔고, 소수 대표단이 의장 무니에와 함께 국왕을 만남. 왕은 파리로 밀가루를 보내겠다고 약속했음. 이는 군중의 요구가 공식 협상으로 이어진 장면이었으나, 약속만으로 불신이 해소되지 않아 많은 참가자가 베르사유에 남았음.
루이 16세가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및 의회가 마련한 초기 헌법 조항을 받아들임. 이는 이미 의회가 채택한 원칙에 대한 국왕의 수용이며, 인권선언 자체를 이날 처음 제정했다는 뜻은 아님. 여성들의 식량 시위와 의회의 헌정 요구가 맞물려 왕권의 양보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변화였음.
라파예트와 파리 국민위병, 베르사유에 도착
파리 국민위병을 지휘한 라파예트가 여성들의 행진을 뒤따라 베르사유로 이동함. 시민들의 요구와 왕실 보호 사이에서 질서를 유지해야 했지만, 밤이 지나도록 군중과 왕실 사이의 긴장은 해소되지 않았음. 다음 날 궁전 침입은 무장 병력의 배치만으로 사태를 통제할 수 없었음을 드러냄.
06 · 화
1789년 10월 6일 베르사유에 모인 파리 시민들이 왕실을 압박해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가족이 파리로 이동함.
식량난과 높은 빵값에 항의한 여성들과 시민들은 전날 파리에서 베르사유까지 행진했고, 10월 6일 새벽 궁전이 습격되는 과정에서 왕실은 군중의 요구를 받아들여 파리 튈르리 궁전으로 이동함. 이 사건으로 왕실은 베르사유의 독립적 정치공간을 사실상 상실하고 혁명의 중심인 파리의 직접적인 압력 아래 놓이게 됨.
새벽 군중 일부가 궁전 안으로 들어가 왕비의 거처 쪽으로 향했고 충돌 과정에서 왕실 경호원들이 살해됨. 마리 앙투아네트는 국왕의 거처로 피신했으며 국민위병이 개입해 내부의 군중을 물러나게 함. 식량을 요구한 전체 행진과 궁전 안에서 벌어진 폭력을 구분하되, 이 위기가 왕실의 파리 이동 결정을 재촉했다는 점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음.
19 · 월
국민제헌의회가 파리 대주교관의 큰 회의실에서 회의를 시작함. 왕실이 10월 6일 파리로 이동한 뒤 의회도 뒤따르면서 베르사유에 있던 국가 정치의 중심이 파리로 옮겨졌음. 이날의 임시 회의장 이전은 11월 마네주 정착과 구분되며, 왕실과 의회의 이동이 하루에 동시에 끝난 것은 아니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