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신보
조직

매일신보

每日新報ja每日申報ja매신

1910년 국권 피탈 직후 대한매일신보를 개제하는 형식으로 창간된 조선총독부의 한국어 기관지. 1904년 창간된 항일 민족지 대한매일신보가 통감부의 매수와 한일병합을 거쳐 1910년 8월 30일 매일신보로 이름을 바꾸며 출발한 신문. 이후 식민 지배의 시정 선전과 홍보를 담당한 대표적 어용 매체.

일본어 기관지 경성일보, 영어 기관지 더 서울 프레스와 함께 조선총독부의 3개 언어 기관지 체계를 구성. 경성일보사 구내에 사옥을 두고 경성일보 편집국 아래에 예속된 상태에서 발행되었으며, 1910년대에는 민간 조선어 신문 발행이 허용되지 않아 사실상 유일한 한국어 일간지로 기능. 1920년 조선일보·동아일보 창간으로 독점 구도가 깨졌으나, 1940년 두 신문이 강제 폐간되면서 광복 때까지 다시 유일한 한국어 일간지로 남음.

어용지라는 성격에도 다른 한글 신문이 허용되지 않던 1910년대에는 신문학 초기 작가들의 발표 지면 역할도 수행. 이광수의 『무정』이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되며 한국 근대소설사의 주요 사건으로 자리함. 1938년 한자 제호를 每日申報에서 每日新報로 바꾸고 경성일보사에서 분리·독립했으며, 광복 후 미군정의 접수와 재편을 거쳐 1945년 서울신문으로 이름을 바꿔 발행.

11 타임라인
2 사실

추가 정보

성격과 위상

조선총독부가 식민 통치의 선전·홍보를 목적으로 발행한 한국어 기관지. "시정의 부연 철저, 민의의 창달, 문화의 향상"을 표방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총독 정치를 합리화하고 식민 정책을 선전한 관제 언론. 사옥이 경성일보사 구내에 있었고 일본어 기관지 경성일보 편집국 아래 한 개 부(部) 수준으로 예속된 상태에서 발행됨. 3·1운동 보도, 황국신민화 선전, 학병·징용 동원 담론 등에서 조선어 지면을 통해 식민 권력의 언어를 조선인에게 전달한 매체.

독점과 병존의 국면

1910년대에는 민간 조선어 신문 발행이 허용되지 않아 한국어 일간지로는 매일신보만 존재. 1920년 문화통치로 조선일보·동아일보가 창간되며 독점이 종료되었으나, 1940년 두 신문이 강제 폐간되면서 광복 때까지 다시 유일한 한국어 일간지로 남음. 이 두 독점기가 식민지 언론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큼.

문학사적 의의

한글 신문이 매일신보뿐이던 1910년대에는 신문학 초기 작가들의 주요 발표 지면 역할도 수행. 이광수의 장편 「무정」이 1917년 1월부터 6월까지 연재되며 근대 소설의 대중적 확산에 기여. 어용 매체라는 한계와 근대 매체로서의 기능이 공존한 이중적 성격을 지님.

타임라인

11
1910 1건
116년 전

통감부가 1909년 발행인 어니스트 베델의 사망 뒤 대한매일신보 매수를 추진하고, 1910년 5월 신문을 장악함. 한일병합조약 공포 다음 날인 1910년 8월 30일 대한매일신보에서 ‘대한’을 떼고 제호를 매일신보로 변경. 한말 항일 민족지가 조선총독부의 한국어 기관지로 전환된 상징적 사건.

1917 1건
109년 전

이광수가 1917년 1월 1일부터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을 연재함. 작품은 6월 14일까지 총 126회에 걸쳐 게재되고, 1918년 단행본으로 간행됨. 언문일치에 가까운 문체와 근대적 서사, 인물 심리 묘사가 포함된 한국 근대문학사상 최초의 장편소설.

1919 1건
107년 전

매일신보가 1919년 3월 7일 3·1운동 관련 보도를 내며 이를 ‘소요사건’으로 다룸. 당시 전국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운동의 상황을 일부 전하면서도, 운동의 의미를 깎아내리고 총독부 기관지의 시각으로 해석. 조선어 유일 일간지였던 매일신보가 식민 통치의 선전 매체로 기능한 사례.

1920 1건
106년 전

3·1운동 이후 일제가 문화정치를 내세우며 조선인의 한글 신문 발행을 제한적으로 허용함. 1920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민간 조선어 신문이 창간되면서 1910년대 내내 유지되던 매일신보의 조선어 신문 독점 구도 종료. 이후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남되, 민간 조선어 신문들과 병존하는 언론 구도 속에 위치.

1938 2건
88년 전

조선총독부가 1938년 1월부터 각 신문과 잡지에 황국신민서사를 게재하게 함. 황국신민서사는 조선인을 일본 천황의 신민으로 편입하려는 황민화 정책의 상징적 맹세문. 매일신보를 비롯한 조선어 지면은 이를 반복적으로 전달하며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 선전의 통로로 기능.

1938년 4월 29일 매일신보가 경성일보사에서 분리·독립하며 주식회사 매일신보로 재편. 이와 함께 한자 제호를 종전 每日申報에서 每日新報로 변경. 경성일보 편집국 산하에 예속되어 있던 조선어 기관지가 별도 회사 조직을 갖추며 총독부 기관지로서의 운영 체제 재정비.

1940 2건
86년 전

이광수가 1940년 2월 20일 『매일신보』에 「창씨와 나」를 게재함. 자신의 이름을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히고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을 지지함. 황민화운동과 내선일체를 선전한 이광수의 친일 행위가 공개적으로 드러난 대표적 사례.

총독부가 한국어 신문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하나만 남긴다는 방침 아래 1940년 1월부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폐간을 압박함. 두 신문은 총독부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1940년 8월 10일 동시에 폐간. 이로써 1920년 문화정치 이후 이어지던 민간 조선어 신문 발행이 끊기고, 매일신보가 일본 패망 때까지 조선어 일간지 지면을 사실상 독점.

1943 1건
83년 전

매일신보가 1943년 12월 7일 「지원 안한 학도 징용, 5일 훈련소에 일제히 입소」 기사를 게재함. 학도지원병제에 응하지 않은 조선인 학생들이 징용 대상으로 처리되는 상황을 보도. ‘지원’이라는 형식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관헌의 압력과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조선인 학생들을 침략전쟁에 동원한 국면에서 학병 지원자를 진정한 국민으로, 미지원자를 비국민, 낙오자로 대비시키며 학병 동원 담론을 만들어낸 것으로 분석됨.

1945 2건
81년 전

광복 직후 사원자치위원회가 매일신보 발행을 이어가던 가운데, 1945년 10월 2일 미군정청이 매일신보사를 접수함. 이후 오세창 등 새 간부진을 중심으로 신문사가 재편되고, 매일신보는 서울신문으로 이름을 바꿔 발행되는 방향으로 정리됨.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해방 직후 새 언론 체제로 넘어가는 과도기.

광복 후 매일신보사에 사원자치위원회가 조직되어 신문 발행을 이어가다가, 1945년 10월 2일 미군정이 매일신보사를 접수함. 미군정은 주주 대표와 사원자치위원회와의 조정을 거쳐 오세창을 사장으로 하는 새 간부진을 구성. 새 간부진은 1945년 11월 23일부터 제호를 서울신문으로 바꾸고 지령을 이어 속간함.

그 외 사실들

기록

  • 조선총독부는 일본어 기관지 경성일보, 영어 기관지 서울프레스, 한글 기관지 매일신보의 3개 언어 기관지 체계를 운영. 매일신보는 그중 한국어 대중을 상대로 한 선전 매체.

  • 매일신보는 국한문판과 한글판 2종으로 발행되었으며, 사옥이 경성일보사 구내에 있어 일본어 기관지 경성일보 편집국 아래 한 개 부(部) 수준으로 예속된 상태로 운영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