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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선언서
주제

기미독립선언서

Korean Declaration of Independence

1919년 3월 1일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한국의 독립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국내외에 선포한 선언서. 천도교·기독교·불교 세 종교계 인사들이 연합해 발표하였으며, 본문 작성은 당대의 문장가 최남선이 맡고 행동강령인 공약 3장은 한용운이 관여한 것으로 전해짐. 흔히 그 해의 간지를 따 기미독립선언서로도 불림.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내세운 민족자결주의,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 그리고 고종의 승하로 고조된 반일 감정을 배경으로 추진됨. 선언서는 조선이 독립국이자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밝힌 본문, 비폭력과 질서 존중을 강조한 공약 3장, 그리고 민족대표 33인의 명단으로 구성.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독립의 의지를 표명하면서도 일체의 행동이 질서를 존중할 것을 천명한 점이 특징.

민족대표들은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 모여 선언서를 낭독하고 스스로 일본 경찰에 연행되었으며,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이 선언서를 낭독해 만세시위가 시작됨. 이 선언서를 도화선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그 열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짐.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는 한국 근대 독립운동의 상징적 문헌.

10 타임라인
6 사실

추가 정보

배경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비밀리에 이어지던 독립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새로운 전기를 맞음.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14개조 평화원칙에서 내세운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독립의 기회로 받아들여짐. 1919년 2월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을 발표해 국내 운동을 자극하였고, 앞서 1월 고종이 승하하면서 반일 감정이 절정에 이름.

추진과 작성

1918년 말부터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을 원칙으로 삼아 온 천도교의 손병희·권동진·오세창·최린 등이 독립선언서 발표를 결의함. 처음에는 대한제국의 옛 고관들을 끌어들이려 했으나 거부에 부딪혔고, 이후 기독교의 이승훈, 불교의 한용운과 손잡아 종교계 연합을 이룸. 선언서 본문은 최린의 요청을 받은 최남선이 1919년 2월 20일 무렵 완성하였으며, 끝에 붙은 공약 3장의 작성자를 두고는 최남선 단독설과 한용운 추가·수정설이 맞섬.

인쇄와 배포

민족대표 명단이 2월 26~27일 사이에 확정된 뒤, 천도교가 경영하던 보성사 인쇄소에서 사장 이종일의 책임 아래 약 2만 1천 부가 인쇄됨. 인쇄본은 2월 28일부터 3월 1일 사이에 천도교·기독교·불교 인사들과 학생들을 통해 전국 각지로 은밀히 배포됨.

발표

본래 탑골공원에서 선언식을 열기로 했으나 학생들의 희생을 우려해 민족대표들은 서울 인사동의 요릿집 태화관으로 장소를 옮김. 3월 1일 오후 29인이 모인 자리에서 한용운의 식사와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연히 연행됨. 한편 탑골공원에서는 정재용이 팔각정 단상에서 선언서를 낭독하였고, 이를 신호로 군중의 만세시위가 시작됨.

의의

기미독립선언서는 전국적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되어 3·1운동을 거족적 항쟁으로 끌어올림. 비폭력 평화 시위의 원칙을 제시하였고, 그 열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짐. 오늘날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한국 독립운동사의 상징적 문헌으로 평가.

타임라인

10
1918 1건
108년 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미 의회 연설에서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 구상을 담은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함. 각 민족이 스스로 정치적 운명을 결정한다는 민족자결주의가 그 핵심 원칙의 하나로 제시됨. 식민지 약소민족에게 독립의 명분으로 받아들여져 한국의 3·1운동을 비롯한 각지 독립운동을 자극한 사상적 배경.

1919 7건
107년 전

대한제국 초대 황제이자 조선 제26대 국왕인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함. 갑작스러운 죽음을 두고 일제에 의한 독살설이 퍼지면서 민중의 반일 감정이 크게 고조됨. 고종의 국장(인산일)을 앞두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들어, 며칠 뒤 3·1운동이 폭발하는 사회적 배경이 됨.

삼일절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이 일본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조선청년독립단 이름으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 집회에는 약 600명이 참석했으며, 선언식 뒤 약 400명이 가두시위를 시도했으나 일본 경찰의 저지와 강제 해산으로 주동자들이 검거됨. 선언서와 관련 문건은 같은 날 일본 정부와 의회, 각국 외교 공관과 언론사 등에 발송되었으며, 국내 독립운동 세력에 자극을 주어 3·1운동 준비를 촉진한 선도적 사건으로 평가.

삼일절 이광수 (춘원) 기초

천도교 측 최린의 요청을 받은 최남선이 독립선언서 본문과 함께 파리강화회의 대표들에게 보내는 청원서, 일본 정부에 대한 통고문 등을 1919년 2월 20일 무렵 완성함. 당대의 이름난 문장가였으나 후환을 우려해 민족대표 명단에는 서명하지 않음. 선언서 끝에 붙은 공약 3장의 작성자를 두고는 최남선 단독설과 한용운 관여설이 함께 전해짐.

손병희를 중심으로 한 천도교계가 기독교의 이승훈, 불교의 한용운 등과 손잡아 종교계 연합 전선을 구성함. 천도교 15인·기독교 16인·불교 2인 등 모두 33인이 민족대표로 서명하기로 하고 손병희를 총대표로 추대함. 유림 측의 참여 교섭은 시간이 촉박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함.

천도교가 경영하던 보성사 인쇄소에서 사장 이종일이 독립선언서 약 2만 1천 부를 비밀리에 인쇄함. 2월 27일 밤 급박하게 진행되었으며, 인쇄 도중 종로경찰서 형사에게 발각될 뻔한 위기를 넘김. 완성된 인쇄본은 2월 28일부터 3월 1일에 걸쳐 천도교·기독교·불교 조직과 학생들을 통해 전국으로 배포됨.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한국의 독립을 선언함.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시민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섬. 비폭력 만세 시위로 시작된 이날의 선언이 전국으로 번지는 3·1운동의 출발점.

삼일절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으로 자리를 옮긴 가운데,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과 시민 앞에서 정재용이 팔각정 단상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함. 낭독이 끝나자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와 서울의 만세시위가 시작됨. 이 시위를 신호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국 각지로 들불처럼 번진 3·1운동의 출발점.

2016 1건
10년 전
2019 1건
7년 전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많은 국민이 함께 읽고 3.1운동의 정신을 함께 나누는 취지에서 100년 전에 쓰여진 「3.1독립선언서」를 각계의 감수를 거쳐 현대 말로 풀어쓴 「쉽고 바르게 읽는 3.1독립선언서」를 펴냄.

그 외 사실들

발언

  •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조선이 독립국이며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첫머리에서 천명한 선언서의 첫 문장.

  • 기미독립선언서는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라는 문장으로 시작함.

논란

  • 선언서 끝의 공약 3장을 누가 작성했는지를 두고 최남선이 본문과 공약 3장을 모두 지었다는 설과 한용운이 추가·수정했다는 설이 대립함. 한용운은 1920년 공판에서 자신이 선언서를 고쳤다고 진술했으나 최린·권동진 등의 회고에서는 한용운의 관여가 부정되어 아직 정설이 없음.

기록

  • 공약 3장은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독립의 의지를 밝히면서도, 일체의 행동이 질서를 존중하고 배타적·폭력적 감정으로 흐르지 말 것을 천명함. 3·1운동을 비폭력 평화 시위의 원칙 위에 세운 행동강령.

  • 선언서는 조선의 독립을 밝힌 본문, 행동강령인 공약 3장, 그리고 민족대표 33인의 명단 세 부분으로 구성됨. 서명자는 천도교 15인·기독교 16인·불교 2인으로 종교계를 망라함.

  •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기독교·불교 세 종교계 인사들로 구성되었으며,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가 대표를 맡음. 손병희·이승훈·한용운·백용성·이필주 등이 포함되었고, 이들은 선언 직후 대부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