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
대한제국 초대 황제이자 조선 제26대 국왕인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함. 갑작스러운 죽음 뒤 일본에 의한 독살설이 퍼져 반일 여론이 높아졌으며, 국장을 앞두고 서울로 모인 사람들의 움직임이 3·1운동의 사회적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됨. 독살설의 유포와 실제 사인을 동일시할 수는 없으며, 고종 사후에는 덕수궁의 궁역 축소와 전각 철거가 더욱 진행됨.
삼일절은 1919년 3월 1일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시작된 3·1 운동을 기념하는 대한민국의 국경일. 독립선언서 발표와 만세 시위를 통해 한국인이 일본 제국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고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린 날을 기념하며, 광복절·제헌절·개천절·한글날과 함께 대한민국의 5대 국경일에 속함.
삼일절의 중심에는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 탑골공원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만세 시위, 학생·종교인·상인·농민 등 다양한 계층의 참여가 자리함. 3·1 운동은 무장 투쟁이 아닌 대중적 비폭력 저항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으며,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국내외 독립운동 확산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
오늘날 삼일절은 단순히 과거의 독립운동을 추모하는 날을 넘어, 식민 지배에 맞선 시민적 용기와 자주독립의 의미를 되새기는 국가적 기념일로 기능함. 정부 기념식, 태극기 게양, 독립유공자 추모 행사 등이 이어지며, 한국 근현대사의 출발점 중 하나로서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의 가치까지 함께 환기하는 날로 자리 잡음.
대한제국 초대 황제이자 조선 제26대 국왕인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함. 갑작스러운 죽음 뒤 일본에 의한 독살설이 퍼져 반일 여론이 높아졌으며, 국장을 앞두고 서울로 모인 사람들의 움직임이 3·1운동의 사회적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됨. 독살설의 유포와 실제 사인을 동일시할 수는 없으며, 고종 사후에는 덕수궁의 궁역 축소와 전각 철거가 더욱 진행됨.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이 일본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조선청년독립단 이름으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 집회에는 약 600명이 참석했으며, 선언식 뒤 약 400명이 가두시위를 시도했으나 일본 경찰의 저지와 강제 해산으로 주동자들이 검거됨. 선언서와 관련 문건은 같은 날 일본 정부와 의회, 각국 외교 공관과 언론사 등에 발송되었으며, 국내 독립운동 세력에 자극을 주어 3·1운동 준비를 촉진한 선도적 사건으로 평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한국의 독립을 선언함.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시민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섬. 비폭력 만세 시위로 시작된 이날의 선언이 전국으로 번지는 3·1운동의 출발점.
천도교·기독교·불교 세 종교계가 연합해 추진한 민족대표 33인은 당초 탑골공원에서 독립을 선언하려 했으나, 유혈 충돌을 피하기 위해 장소를 인사동 음식점 태화관으로 옮김. 1919년 3월 1일 오후 이곳에 모인 대표들은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만세를 부르고 스스로 일제 경찰에 연락해 체포됨.
한편 같은 날 탑골공원에는 학생과 시민 수천 명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에 나섬.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의 함성은 곧 평양·의주 등 전국으로, 나아가 국외 한인 사회로까지 들불처럼 번져 거족적 항쟁으로 발전함.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가 평양·진남포·의주 등 북부 도시를 거쳐 전국 거의 모든 군으로 번지며 약 두 달간 이어짐. 학생·농민·노동자·상인 등 각계각층이 참여했고, 만주·연해주·미주 등 국외 한인 사회로도 시위가 확산됨. 신분과 지역을 넘어선 거족적 항쟁으로,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으로 기록됨.
3·1운동을 계기로 상하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사건. 4월 10일 밤부터 11일까지 이어진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담은 임시헌장 10개 조를 채택한 결정.
신분·성별 등의 차별 없는 평등, 신앙·언론·거주 등의 자유와 선거에 관한 권리를 규정하고, 국무총리 이승만을 비롯한 국무원을 구성한 정부 수립. 군주 중심의 국가에서 벗어나 국민을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세우려 한 헌정 구상.
임시헌장은 1948년 제헌헌법과 별개의 문서이지만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민주공화제의 역사적 토대. 현행 헌법 전문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하는 헌정사의 출발점.
일본군 중위 아리타 도시오가 이끄는 군경이 경기도 화성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에 모아 가둔 뒤 총격을 가하고 불을 질러 학살함. 이 사건으로 28명이 목숨을 잃고 인근 마을을 포함해 30여 채의 집이 불탐. 캐나다인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가 현장을 사진과 기록으로 남겨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린, 3·1운동 탄압의 대표적 참상.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3·1독립선언 1주년을 맞아 첫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함. 임시정부 주최 기념식과 교민단 주최 축하식, 시가행진·기념공연 등이 열렸고,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이날을 '국경일'로 부르며 경축함. 임시정부 시기 3·1절의 정식 명칭은 '독립선언일'이었으며, 이날이 해마다 기념되는 민족 명절로 자리 잡는 출발점이 됨.
유관순이 서대문감옥에 수감된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3·1운동 1주년을 맞아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함. 수감자들이 이에 호응했으며, 이후 유관순을 비롯한 참가자들이 가혹한 탄압을 받음.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서대문감옥에 수감 중이던 유관순이 1920년 9월 28일 서거. 수감 중에도 독립만세운동을 이어갔으며, 순국 이후 3·1운동과 학생·여성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인물로 기억됨.
대한민국 정부가 1949년 10월 1일 법률 제53호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공포해 3·1절을 4대 국경일의 하나로 공식 지정함. 이로써 3·1절은 제헌절·광복절·개천절과 함께 국가가 기리는 국경일이자 공휴일이 됨. 광복 이후 대한민국이 3·1운동의 정신을 국가 차원에서 계승·기념하는 법적 토대가 마련됨.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중앙기념식이 열림. 문재인 대통령 내외와 독립유공자, 일본군 위안부·강제동원 피해자 등 각계 인사와 시민 약 1만 명이 참석함. 100년 전 만세의 함성을 기리며 3·1운동의 의미를 되새긴 대규모 국가 기념행사.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정부가 유관순에게 건국훈장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함. 제100주년 3·1절 중앙기념식에서 훈장이 수여됨.
기미독립선언서는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라는 문장으로 시작함.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기독교·불교 세 종교계 인사들로 구성되었으며,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가 대표를 맡음. 손병희·이승훈·한용운·백용성·이필주 등이 포함되었고, 이들은 선언 직후 대부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름.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1920) 통계에 따르면 3·1운동은 약 두 달간 집회 1,542회, 참가 인원 약 202만 명에 이르렀고, 이 과정에서 7,509명이 사망하고 15,961명이 부상했으며 46,948명이 체포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