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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03

1919년 3월

13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한국의 독립을 선언함.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시민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섬. 비폭력 만세 시위로 시작된 이날의 선언이 전국으로 번지는 3·1운동의 출발점.

1919년 3월 1일 시작된 3·1운동에서 전국의 시위 군중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침. 일제가 금지한 태극기를 거리에 내건 행위 자체가 독립 의지의 표현이었고, 이를 계기로 태극기는 광복 이전까지 한국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굳어짐. 같은 해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태극기를 국기로 계승함.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으로 자리를 옮긴 가운데,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과 시민 앞에서 정재용이 팔각정 단상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함. 낭독이 끝나자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와 서울의 만세시위가 시작됨. 이 시위를 신호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국 각지로 들불처럼 번진 3·1운동의 출발점.

기미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3인은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함. 당일 태화관에는 29명이 모여 선언식을 진행한 뒤 일본 경찰에 연행됨. 독립운동 준비 과정에서 유림계에도 참여가 요청됐으나 곽종석의 회신이 늦어 민족대표에 합류하지 못했고, 이후 유림은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는 별도의 운동을 전개함.

파리장서운동

매일신보가 1919년 3월 7일 3·1운동 관련 보도를 내며 이를 ‘소요사건’으로 다룸. 당시 전국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운동의 상황을 일부 전하면서도, 운동의 의미를 깎아내리고 총독부 기관지의 시각으로 해석. 조선어 유일 일간지였던 매일신보가 식민 통치의 선전 매체로 기능한 사례.

매일신보

신한청년당이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한 한국 대표로서 1919년 2월 1일 상하이를 출발해 3월 13일 파리에 도착. 파리 샤토당 거리 38번지에 평화회의 한국민대표관을 설치하고 파리한국통신부를 운영하며 한국 독립을 알리기 위한 외교·홍보 활동에 착수. 회의 참석 자격이 정부 대표로 제한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상하이에 임시정부 수립과 대표 신임장 발급을 요청함.

김규식 (우사)

김창숙은 경상남도 거창의 곽종석 거처를 찾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는 계획과 문안을 협의함. 장석영과 김황이 각각 작성한 초안을 검토하고 김황의 문안을 바탕으로 외교 활동에 활용하기 적합하도록 새로운 청원서를 작성함. 곽종석은 수정된 독립청원서와 서명자 명단을 김창숙에게 건네고 해외 이동을 위한 여비와 연락망 마련을 지원함.

파리장서운동

김창숙은 유림 대표 137명의 서명이 담긴 파리장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전달하기 위해 3월 23일 밤 경성역을 떠나 중국으로 향함.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청원서와 여비는 김창숙이 직접 소지하지 않고 중국 상점 동순태를 통해 봉천 지점으로 미리 보냈으며, 김창숙은 이동 중 봉천에서 이를 인수함. 파리강화회의를 상대로 유림의 독립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해외 활동이 실행 단계에 들어감.

파리장서운동

김창숙은 안동·봉천·천진·제남·남경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해 이시영·조성환·신채호·조완구·신규식 등과 파리장서 제출 방안을 논의함. 당초 직접 파리로 향하려 했으나 김규식이 이미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위해 상하이를 떠난 사실을 확인하고 파리행을 포기함. 이후 파리장서를 영문으로 번역·인쇄해 파리강화회의와 각국 외교 관계자 등에 우편으로 보내고, 김창숙은 상하이에 남아 대중국 외교 활동을 벌이기로 결정함.

파리장서운동 김규식 (우사) 파리강화회의 대표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가 평양·진남포·의주 등 북부 도시를 거쳐 전국 거의 모든 군으로 번지며 약 두 달간 이어짐. 학생·농민·노동자·상인 등 각계각층이 참여했고, 만주·연해주·미주 등 국외 한인 사회로도 시위가 확산됨. 신분과 지역을 넘어선 거족적 항쟁으로,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으로 기록됨.

영남유림과 호서유림이 별도로 추진하던 독립청원 운동을 통합하고 양측 청원서의 서명자 명단을 합쳐 유림 137인 명의의 파리장서를 완성함. 문안은 김황이 작성한 초안을 바탕으로 곽종석과 김창숙 등이 수정한 독립청원서를 채택함. 김창숙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유림 대표로 정하고, 호서유림의 임석후에게 국내외 연락 임무를 맡김.

파리장서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