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파리장서운동
주제

파리장서운동

Paris Petition Movement

파리장서운동은 1919년 유교 지식인과 유림 대표들이 파리강화회의를 향해 한국의 독립을 청원한 국제적 독립운동임. 곽종석과 김복한 등을 중심으로 영남·호서 유림이 결집해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를 작성하고 137명의 유림이 서명함. 김창숙은 이를 상하이로 반출한 뒤 파리에 있던 김규식에게 송달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 의사를 전달하고자 함.

3·1운동의 전개와 파리강화회의라는 국제 정세를 배경으로 전통 유림이 외교적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사례임. 문안 작성과 서명 수합에는 지역과 학맥을 아우르는 유림의 인적망이 동원되었으며, 상하이에서는 파리장서를 한문본과 영문본으로 대량 인쇄해 각국 대표와 공사관에 발송하고 국내 향교에도 배포함. 이를 통해 한국 독립의 정당성과 유림의 독립 의사를 국내외에 알리고자 함.

이 운동은 유교계가 민족 독립운동의 주체로 조직적으로 결집하고 국제사회를 상대로 독립의 정당성을 제기한 중요한 사건임. 일제의 검거와 투옥으로 관련 인사들이 탄압받았으나, 전통 지식인층이 국제 정세를 인식하고 외교 활동과 국내 항일운동을 연결한 사례로서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님.

14 타임라인

타임라인

14
국제적 배경 1건
108년 전

윌슨은 미국 의회 연설에서 공개 외교, 항해의 자유, 군비 축소, 민족과 영토 문제의 조정, 국제연맹 창설 등을 포함한 전후 평화 구상 14개 항목을 제시함. 이 구상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를 재편하기 위한 미국의 전쟁 목표와 평화 원칙을 제시한 것으로, 이후 여러 민족의 독립운동 세력이 국제사회에 독립 문제를 호소하는 데 영향을 미침. 한국 독립운동계에서도 파리강화회의를 독립의 당위성을 국제사회에 알릴 기회로 인식하는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됨.

국제적 배경 1건
107년 전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 대표들이 파리에서 전후 평화조약을 준비하는 회의를 열음. 회의에는 27개국이 대표를 파견했으며, 패전국은 초청 대상에서 제외됨. 새 국경과 국제관계 원칙, 국제연맹 구상을 논의하는 다자외교의 장이 마련됨.

기획과 작성 3건
107년 전

경남 거창에 있던 곽종석의 문인 윤충하가 파리강화회의에 유림 대표 명의의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자고 제안함. 청원 방식은 한국의 독립 의사를 국제 여론에 호소하는 방안으로 설정됨. 유림계의 독립청원 논의가 곽종석을 중심으로 구체화됨.

민족대표 33인은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함. 당일 태화관에는 29명이 모여 선언식을 진행한 뒤 일본 경찰에 연행됨. 독립운동 준비 과정에서 유림계에도 참여가 요청됐으나 곽종석의 회신이 늦어 민족대표에 합류하지 못했고, 이후 유림은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는 별도의 운동을 전개함.

김창숙은 경상남도 거창의 곽종석 거처를 찾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는 계획과 문안을 협의함. 장석영과 김황이 각각 작성한 초안을 검토하고 김황의 문안을 바탕으로 외교 활동에 활용하기 적합하도록 새로운 청원서를 작성함. 곽종석은 수정된 독립청원서와 서명자 명단을 김창숙에게 건네고 해외 이동을 위한 여비와 연락망 마련을 지원함.

국외 전달 2건
107년 전

김창숙은 유림 대표 137명의 서명이 담긴 파리장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전달하기 위해 3월 23일 밤 경성역을 떠나 중국으로 향함.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청원서와 여비는 김창숙이 직접 소지하지 않고 중국 상점 동순태를 통해 봉천 지점으로 미리 보냈으며, 김창숙은 이동 중 봉천에서 이를 인수함. 파리강화회의를 상대로 유림의 독립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해외 활동이 실행 단계에 들어감.

김창숙은 안동·봉천·천진·제남·남경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해 이시영·조성환·신채호·조완구·신규식 등과 파리장서 제출 방안을 논의함. 당초 직접 파리로 향하려 했으나 김규식이 이미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위해 상하이를 떠난 사실을 확인하고 파리행을 포기함. 이후 파리장서를 영문으로 번역·인쇄해 파리강화회의와 각국 외교 관계자 등에 우편으로 보내고, 김창숙은 상하이에 남아 대중국 외교 활동을 벌이기로 결정함.

김규식 (우사) 파리강화회의 대표
기획과 작성 1건
107년 전

영남유림과 호서유림이 별도로 추진하던 독립청원 운동을 통합하고 양측 청원서의 서명자 명단을 합쳐 유림 137인 명의의 파리장서를 완성함. 문안은 김황이 작성한 초안을 바탕으로 곽종석과 김창숙 등이 수정한 독립청원서를 채택함. 김창숙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유림 대표로 정하고, 호서유림의 임석후에게 국내외 연락 임무를 맡김.

확산과 탄압 2건
107년 전

성주읍 장날을 맞아 유림과 기독교계 인사, 주민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함. 파리장서 서명자 이봉희를 비롯한 지역 인사들도 시위를 주도했으며, 일제 경찰은 참가자들을 체포하고 강하게 탄압함. 이후 주도자들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유림이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낸 사실이 드러나면서 파리장서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로 이어짐.

일제 경찰은 4월 2일 성주 만세운동을 탄압하고 주도자들을 체포·취조하는 과정에서 유림이 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려 한 사실을 알아냄. 송우선·송훈익·송문근 등이 붙잡히면서 파리장서운동의 존재가 일제에 드러났고, 이후 서명자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됨. 성주 지역을 비롯해 곽종석 등 파리장서운동 관련 유림에 대한 체포와 투옥으로 탄압이 확대됨.

국외 전달 2건
107년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립과 함께 이미 파리에서 독립외교 활동을 벌이던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의 대한민국 대표로 임명함. 김규식은 앞서 2월 1일 상하이를 떠나 3월 13일 파리에 도착해 한국공보국을 설치하고 각국 대표와 언론을 상대로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알리고 있었음. 임시정부의 공식 대표 자격을 부여받으면서 파리에서 진행되던 독립외교 활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으로 연결됨.

김규식 (우사) 임명자

김창숙 등 유림 측은 상하이에서 파리장서를 영문으로 번역하고 국문본과 함께 수천 부를 인쇄함. 인쇄본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대표와 각국 공관, 국내 각 향교 등에 발송됨. 파리장서의 내용이 해외 외교 관계자와 국내 유림 사회에 함께 전달되면서 독립청원운동의 범위가 확대됨.

김규식 (우사) 파리 전달 대상
확산과 탄압 1건
107년 전

유림의 독립청원운동은 1919년 2월 19일 윤충하가 곽종석에게 파리강화회의 독립청원을 제안한 뒤 6월경까지 약 4개월 동안 전개됨. 3·1독립선언의 민족대표에 유림 인사가 참여하지 못한 상황과 일부 유림 명의의 독립불원서에 대한 반발 등이 독자적인 청원운동을 추진하는 배경으로 작용함. 파리장서운동은 유림이 조직적으로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 의사를 호소한 운동으로, 이후 전개된 유림계 독립운동과 구분해 제1차 유림단운동으로도 불림.

기억과 계승 1건
3년 전

김재욱 칠곡군수는 서울 주한 프랑스대사관에서 필립 르포르 대사에게 회당 장석영이 작성한 파리장서 초안을 수록한 서책을 전달함. 칠곡군이 제작한 서책에는 파리장서의 한글·프랑스어·영어 번역문과 발간사, 파리장서와 장석영을 소개하는 글이 담김. 칠곡군은 서책을 프랑스 도서관에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1919년 당시 제작·발송된 것으로 알려진 파리장서 외국어 번역본의 소재 확인에도 협조를 요청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