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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06

19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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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연합국과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하며 대독 강화가 확정. 독일은 협상에서 배제된 채 막대한 배상과 영토 상실, 군비 제한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임. 회의의 핵심 산물이자 이후 독일의 반발과 국제 정세 불안의 불씨가 된 조약.

인종 평등 제안 (1919)

1919년 1월 18일 개막한 파리 강화 회의, 한국 독립 문제를 정식 의제로 다루지 않은 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 체결과 함께 폐막. 김규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독립 청원서와 항고서를 제출하고 각국 대표단에 한국 문제의 의제 상정을 요청했으나, 승전국 일본의 방해와 열강의 외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음. 민족자결주의가 승전국의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는 선택적 원칙이라는 한계가 드러났으며,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도 큰 타격을 받음.

유림의 독립청원운동은 1919년 2월 19일 윤충하가 곽종석에게 파리강화회의 독립청원을 제안한 뒤 6월경까지 약 4개월 동안 전개됨. 3·1독립선언의 민족대표에 유림 인사가 참여하지 못한 상황과 일부 유림 명의의 독립불원서에 대한 반발 등이 독자적인 청원운동을 추진하는 배경으로 작용함. 파리장서운동은 유림이 조직적으로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 의사를 호소한 운동으로, 이후 전개된 유림계 독립운동과 구분해 제1차 유림단운동으로도 불림.

파리장서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