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평안남도 강서군 동진면 탄포리의 교회가 판동교회에서 분립함. 대한예수교장로회 계열 기록은 안창호를 전도인으로, 서순화·김용기·오하준을 창설 교인으로 전함. 뒤에 당회를 조직하고 지역 장로교회로 활동한 사실이 관보와 당시 신문 자료에서 확인됨.
안창호
도산(島山) 안창호(1878~1938)는 대한제국 말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사상가. 실력양성론(實力養成論)에 입각해 교육·산업·인격 수양을 통한 민족 역량 강화를 독립운동의 근간으로 삼은 인물.
국내에서는 강서 점진학교와 평양 대성학교를 세우고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해 국권회복운동을 이끌었으며, 미국에서는 공립협회·대한인국민회·흥사단을 창립해 재미 한인사회를 결집. 3·1운동 이후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로서 통합 임시정부 수립과 연통제·교통국 조직을 주도.
무실(務實)·역행(力行)과 인격 혁명을 강조한 흥사단 운동의 창시자이자 실력양성운동의 대표적 사상가. 1932년 윤봉길 의거 직후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고,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수감된 뒤 1938년 옥고 후유증으로 별세. 사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된 한국 근대 민족운동의 지도적 인물.
추가 정보
생애 개관
안창호는 1878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나 청년기에 서울에서 신학문과 기독교를 접하고 계몽운동에 참여함. 1899년 고향 강서에 근대 학교인 점진학교를 세워 교육운동을 시작하고, 1902년 선진 교육을 배우고자 미국으로 건너감.
미주 한인사회의 결집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한 뒤 1903년 친목회, 1905년 공립협회를 조직해 흩어져 있던 재미 한인을 규합함. 1907년 귀국해 비밀결사 신민회를 결성하고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워 국내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함. 국권 상실을 전후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대한인국민회를 이끌었고, 19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창립해 무실역행의 인격 수양 운동을 조직화함.
임시정부와 만년
3·1운동 직후인 1919년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를 맡아 통합 임시정부의 기틀을 세우고,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서 독립운동 진영의 통합을 모색함. 1932년 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뒤 옥고를 치름.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재수감되었고, 고문 후유증으로 1938년 3월 경성에서 별세함.
타임라인
30안창호가 독립협회에 참여하고 평양에서 관서지부 조직을 주도함. 평양 쾌재정에서 열린 집회에서 정부와 관리의 무능을 비판하고 민중의 각성과 근대화를 촉구하는 연설을 하며 대중적 명성을 얻음.
1899년 평안남도 강서군 동진면에 근대 사립학교 점진학교를 세움. 강서 지방 최초의 근대 학교로 초등 과정 남녀공학을 실시함. 교육을 통한 민족 실력양성을 지향한 안창호 교육운동의 출발점.
1902년 선진 교육을 배우고자 미국 유학길에 오름. 그해 10월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해 소학교에 입학하며 영어 공부를 시작함. 이후 재미 한인사회 조직화와 독립운동의 무대가 된 전환점.
안창호, 샌프란시스코에서 정치단체 친목회 조직
190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재미 한인 단체 공립협회를 창설하고 초대 회장을 맡음. 회관을 건립하고 기관지 《공립신보》를 발행함. 흩어져 있던 재미 한인을 결집한 미주 독립운동 조직화의 기반.
1907년 귀국해 국권회복을 목표로 한 비밀결사 신민회 결성을 주도함. 교육·산업·언론을 통한 실력양성과 국민 계몽을 지향함. 대성학교·오산학교 설립과 태극서관 운영 등 국내 실력양성운동의 중심이 됨.
1908년 평양에 중등 교육기관 대성학교를 설립함. 민족운동을 이끌 간부 양성을 목표로 지식 교육과 애국심·상무 정신 함양을 병행함. 신민회 교육 구국 사업의 대표적 성과.
한삼현·윤재명·정인숙·윤성운·전재풍·이덕환·최유문 등 평양 지역 인사들이 1908년 평양 마산동에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이승훈이 초대 사장을 맡음. 조선인용 식기 생산과 근대 요업기술의 확산을 목표로 한 식산흥업 사업. 신민회의 산업진흥 구상과 맞닿은 근대 기업이지만 안창호를 직접 발기인으로 단정할 근거는 확인되지 않음.
안창호와 최남선 등이 신민회의 외곽 청년 조직으로 청년학우회를 창립함. 무실·역행 등의 덕목을 내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청년 수양 단체. 1910년 한일병합과 105인 사건으로 해산되었으나 그 이념이 흥사단으로 계승된 원류.
안창호, YMCA회관에서 '전도(前途)의 희망'이란 제목으로 연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직후 일제가 안창호를 배후 관련 혐의로 체포함. 안창호는 수개월 동안 구금됐다가 혐의가 입증되지 않아 석방됨.
안창호가 국권피탈 전후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의 새로운 거점을 모색함. 산둥성 칭다오에서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회의를 열고 북만주에 집단 거주지와 군사교육 기반을 조성하는 방안을 추진했으나 자금 부족과 노선 차이로 실현하지 못함.
중국에서 독립운동기지 건설 계획이 난항을 겪은 뒤 안창호가 러시아를 거쳐 미국으로 이동함. 이후 미주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독립운동 조직 정비와 지도자 양성에 집중함.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민족운동단체 흥사단을 창립함. 청년학우회를 확대 조직해 안창호 등 발기인 6인이 창단발기인대회를 개최하고 안창호를 전권위원으로 선출함. 무실역행과 인격 수양을 통한 민족 역량 강화를 지향한 흥사단 운동의 시작.
안창호가 미주 한인 독립운동의 대표적 통합 조직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에 선출됨. 흥사단을 통한 인재 양성과 함께 대한인국민회를 기반으로 재미 한인사회의 조직화와 독립운동 지원을 이끌게 됨.
3·1운동 이후 안창호가 대한인국민회 원동위원 자격으로 상하이에 도착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함. 연통제와 교통국 설치, 독립운동 세력의 임시정부 통합 등을 추진하며 임시정부의 조직 기반을 정비함.
1919년 6월 28일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에 정식 취임함. 연통제와 교통국을 조직하고 《독립신문》 발행을 주도하며 통합 임시정부 수립을 이끎. 초기 임시정부 운영의 실질적 중심 역할.
상하이·한성·연해주 등에서 구성된 임시정부 계통이 통합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통합 체제가 성립함. 안창호는 정부 통합을 적극 추진하고 새 체제에서 노동국총판 등을 맡아 임시정부 운영에 참여함.
안창호가 미주 단원들을 상하이로 불러 1920년 9월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를 설치함. 미주에 한정되던 활동을 중국 지역으로 확장한 전환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자리한 상하이를 거점으로 국외 민족운동의 폭을 넓힌 계기.
독립운동 세력 간 노선 갈등 속에서 안창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각 통일을 시도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함. 이후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전체의 진로를 재논의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주장함.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부의장에 취임함. 국내외 각 단체 대표 140여 명이 모여 독립운동 진영의 통합과 진로를 논의함. 진영 간 대립으로 성과 없이 결렬되었으나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통합 시도.
국내에 흥사단 계열 단체가 두 개로 나뉘어 결성된 사실을 안 안창호가 1923년 3월 이광수를 베이징으로 불러 서울의 수양동맹회와 평양의 동우구락부를 합동하도록 지시. 국내 흥사단 운동의 활성화와 통일적 조직화를 겨냥한 조치. 이 지시가 1926년 두 단체의 통합과 수양동우회 결성으로 이어짐.
안창호가 통합을 권유해 온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가 수양동우회로 통합됨. 흥사단의 국내 계열 조직이 하나로 정비되면서 인격 수양과 민족운동을 결합한 안창호의 국내 조직 기반이 형성됨.
1926년 10월 중국 베이징에서 한국독립유일당 북경촉성회가 창립되고 같은 달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로 개칭됨. 안창호와 원세훈이 중심이 되어 이념이 다른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하려 함. 이후 관내와 만주 각지로 촉성회가 확산되는 민족유일당운동의 본격적 출발점.
안창호와 흥사단 계열 인사 및 만주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지린성에서 농민호조사를 조직함. 한인 농민의 경제적 자립과 생활 개선을 지원하고 이를 독립운동의 장기적 기반으로 연결하려는 이상촌 건설 구상의 일부였음.
안창호가 상하이에서 독립운동 세력의 조직적 결집을 목표로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함. 1920년대 후반부터 추진한 민족유일당 운동과 독립운동 세력 통합 구상의 연장선에 해당함.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 윤봉길 의거가 일어난 날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됨. 한국소년동맹회 지원금 전달차 이유필의 자택을 방문했다가 검거되어 국내로 압송됨. 그해 12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4년형을 선고받음.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8월 15일 예심 종결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음. 지병이 악화되어 병보석으로 출소한 뒤 같은 해 12월 24일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에 입원함.
수양동우회 사건 수감 중 지병이 악화되어 병보석으로 출소한 안창호가 1938년 3월 10일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에서 별세함. 독립기념관 자료는 1937년 12월 24일 입원 뒤 사망했다고 기록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사인을 간경화증으로 설명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