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몬테소리가 1907년 1월 6일 이탈리아 로마 산로렌초 지역 비아 데이 마르시 53번지에서 첫 '어린이의 집'(Casa dei Bambini)을 열었음. 빈곤층 가정의 유아가 준비된 환경에서 스스로 활동할 수 있도록 교육 재료와 교실을 구성했으며, 이 실천이 몬테소리 교육법으로 발전하는 출발점이 됨. 어린이를 수동적 교육 대상이 아닌 자율적으로 학습하는 주체로 보는 관점이 확산하는 계기.
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에서 문회명을 대동광문회로 바꾸기 위한 특별회가 열림. 부사장 서상돈이 일본에 대한 국채 1,300만 원을 국민의 힘으로 갚자고 제안하고, 사장 김광제 등 참석자들이 호응함. 김광제는 담뱃대와 담배쌈지를 버리고 3개월치 담뱃값 60전과 별도 의연금 10원을 내놓았으며, 참석자들이 즉석에서 약 2,000원을 모금함. 전국으로 확산된 국채보상운동의 출발점.
대한매일신보, 취지서·의연금 명단 보도로 국채보상운동 확산
《대한매일신보》가 1907년 2월 21일 「국채일천삼백만원보상취지」를 가장 먼저 게재한 뒤 기사·논설·기고와 의연금 광고를 통해 운동을 지속적으로 알림. 의연자가 급증하자 지면을 확대하고, 명단을 모두 싣지 못할 때에는 별도 부록을 발행해 성명과 금액을 공개함. 언론을 통한 공개 모금이 대구에서 시작된 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핵심 기반이 됨.
1907년 2월 21일 김광제와 서상돈 등이 작성한 「국채일천삼백만원보상취지」가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됨. 대한제국 국민 약 2,000만 명이 3개월 동안 담배를 끊고 매달 20전씩 모아 일본에 대한 국채 1,300만 원을 갚자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제시함. 대구에서 시작된 제안이 신문을 통해 전국에 알려지고 각지의 단연회와 국채보상단체 결성으로 이어지는 계기.
김성희 등, 서울에서 국채보상기성회 조직
1907년 2월 22일 서울에서 김성희·유문상·오영근 등이 국채보상기성회를 조직하고 취지서와 회칙을 마련함. 국민 의연금을 모아 일본에 대한 국채 1,300만 원을 갚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서점·약국·《대한매일신보》사·잡지사 등을 의연금을 받는 수전소로 지정함. 서울에 모금·보관 체계가 마련되면서 각 지역과 계층의 국채보상 조직 결성이 확산됨.
1907년 3월 15일 서울 대안동 국채보상부인회가 《대한매일신보》에 취지서를 게재하고 전국 여성의 참여를 호소함. 여성도 국가의 혜택을 받는 백성으로서 국채 보상에 참여해야 한다고 밝히고, 신분과 관계없이 의연금을 낸 사람을 회원으로 인정함. 이후 각지에서 부인감찬회·패물폐지부인회·탈환회 등 여성 단체가 조직되고 패물과 생활비를 절약한 돈을 기부하면서 운동의 참여 기반이 확대됨.
일본에서 귀국한 뒤 서울 종로에 서양식 개인 진료소를 열고 개업의로 활동하기 시작함. 한국인 초기 근대 개업의의 대표적 사례로 평가됨.
이모겐 홀스트 출생
영국의 작곡가 이모겐 홀스트. (~1984년)
라르스 알포르스 출생
핀란드의 수학자 라르스 알포르스. (~1996년)
프레드 진네만 출생
미국의 영화 감독 프레드 진네만. (~1997년)
고종의 헤이그 특사 파견
중명전에 머물던 고종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함. 외교권을 빼앗긴 현장이 주권 회복을 위한 외교 노력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 사건.
대프니 듀모리에 출생
영국의 소설가, 극작가 대프니 듀모리에. (~1989년)
로런스 올리비에 출생
잉글랜드의 배우 로런스 올리비에. (~1989년)
로절린드 러셀 출생
미국의 배우 로절린드 러셀. (~197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