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학당 학생 유관순이 고향인 충남 천안 병천(아우내) 장터에서 조인원·유중권 등과 함께 수천 명이 참여한 대규모 만세 시위를 주도함. 일제 헌병의 발포로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해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다수가 부상함. 유관순은 주동자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 이듬해 옥중에서 순국, 3·1운동을 상징하는 인물로 남음.
1919년 4월
총 15건
성주읍 장날을 맞아 유림과 기독교계 인사, 주민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함. 파리장서 서명자 이봉희를 비롯한 지역 인사들도 시위를 주도했으며, 일제 경찰은 참가자들을 체포하고 강하게 탄압함. 이후 주도자들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유림이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낸 사실이 드러나면서 파리장서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로 이어짐.
일제 경찰은 4월 2일 성주 만세운동을 탄압하고 주도자들을 체포·취조하는 과정에서 유림이 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려 한 사실을 알아냄. 송우선·송훈익·송문근 등이 붙잡히면서 파리장서운동의 존재가 일제에 드러났고, 이후 서명자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됨. 성주 지역을 비롯해 곽종석 등 파리장서운동 관련 유림에 대한 체포와 투옥으로 탄압이 확대됨.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1회 회의에서 파리에 체류하던 김규식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 겸 파리 주재위원으로 선임. 임시정부는 4월 13일 외무총장 임명장과 파리 강화 회의 전권대사 신임장을 전보로 발송. 김규식은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공식 외교관의 자격으로 파리에서 독립 외교를 전개함.
3·1운동으로 분출된 독립 열망을 이어받아, 중국 상하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함.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핵심으로 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채택함. 군주국이 아닌 국민주권의 공화국을 표방한 한국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로, 3·1운동의 가장 큰 정치적 결실로 평가됨.
파리 강화 회의 국제연맹 규약 위원회에서 마키노 노부아키가 인종이나 국적에 따른 차별 없이 외국인을 평등하게 대우한다는 내용의 수정안을 재제출함. 출석 위원 17명 가운데 11명의 찬성을 확보했으나, 의장 우드로 윌슨이 강한 반대가 존재하는 중요 사안에는 만장일치가 필요하다고 판정하면서 채택되지 못함.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빌리 휴즈는 제안이 백호주의 이민정책을 위협할 것으로 보고 영국 대표단 등에 지속적으로 반대 압력을 행사함. 다수의 지지를 얻고도 국제연맹 규약에 인종 평등 원칙을 포함시키는 데 실패한 결정적 사건이 됨.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립과 함께 이미 파리에서 독립외교 활동을 벌이던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의 대한민국 대표로 임명함. 김규식은 앞서 2월 1일 상하이를 떠나 3월 13일 파리에 도착해 한국공보국을 설치하고 각국 대표와 언론을 상대로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알리고 있었음. 임시정부의 공식 대표 자격을 부여받으면서 파리에서 진행되던 독립외교 활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으로 연결됨.
일본군 중위 아리타 도시오가 이끄는 군경이 경기도 화성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에 모아 가둔 뒤 총격을 가하고 불을 질러 학살함. 이 사건으로 28명이 목숨을 잃고 인근 마을을 포함해 30여 채의 집이 불탐. 캐나다인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가 현장을 사진과 기록으로 남겨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린, 3·1운동 탄압의 대표적 참상.
대한민국의 시인 김종문. (~1981년)
미국의 기업인, 자선가, 영화 프로듀서 앤 바이든스. (~2021년)
서울에서 선포된 임시정부. 당시 일제는 경성이라고 불렀으나 한일병합 이전, 조선시대에는 한성이라 불렸고, 이를 따라 한성정부(漢城政府)라 함.
국제연맹 규약을 확정하는 본회의에서 마키노 노부아키가 2월 13일 제출부터 4월 11일 미채택까지의 경위를 정리해 진술하고 원안 조문을 다시 낭독함. 정당한 요구가 승인되지 않은 데 대해 일본 정부와 국민의 통절한 유감을 표명하면서도 이 자리에서 즉시 채택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밝힌 입장. 회의는 같은 날 인종 평등 조항이 없는 국제연맹 규약을 채택함.
우드로 윌슨·조르주 클레망소·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와 일본 대표 마키노 노부아키·진다 스테미가 산둥 처리안을 협의함. 일본이 산둥의 중국 주권을 반환하되 독일의 경제적 권리와 칭다오 거류지 관련 권리를 승계한다는 방침을 확인하고, 독일의 권리·재산을 일본에 넘기는 조약 조항을 확정함. 중국의 직접 반환 요구와 충돌한 이 결정이 중국 내 반발과 베르사유 조약 서명 거부로 이어진 전개.
김창숙 등 유림 측은 상하이에서 파리장서를 영문으로 번역하고 국문본과 함께 수천 부를 인쇄함. 인쇄본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대표와 각국 공관, 국내 각 향교 등에 발송됨. 파리장서의 내용이 해외 외교 관계자와 국내 유림 사회에 함께 전달되면서 독립청원운동의 범위가 확대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