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미국에 있던 이승만이 국무총리로 선출됨.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선출했음. 전날 시작된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내세운 임시헌장을 채택한 결과였음. 당시 이승만은 미국에 있었으므로 상하이 현장에서 정부 수립 회의를 주도하거나 곧바로 현지에 부임한 것은 아니었음.

임시헌장은 국민의 평등과 여러 자유, 선거권과 피선거권, 교육·납세·병역의 의무 등을 규정했음. 이승만의 선출은 미국을 무대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를 신생 임시정부의 지도부에 포함시킨 결정이었음. 이때의 직책은 국무총리였고,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은 같은 해 9월 여러 임시정부 계통의 통합과 정부 조직 개편을 추진하는 과정에서였음.

이승만

3·1운동을 계기로 상하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사건. 4월 10일 밤부터 11일까지 이어진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담은 임시헌장 10개 조를 채택한 결정.

신분·성별 등의 차별 없는 평등, 신앙·언론·거주 등의 자유와 선거에 관한 권리를 규정하고, 국무총리 이승만을 비롯한 국무원을 구성한 정부 수립. 군주 중심의 국가에서 벗어나 국민을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세우려 한 헌정 구상.

임시헌장은 1948년 제헌헌법과 별개의 문서이지만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민주공화제의 역사적 토대. 현행 헌법 전문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하는 헌정사의 출발점.

대한민국 헌법 삼일절

파리 강화 회의 국제연맹 규약 위원회에서 마키노 노부아키가 인종이나 국적에 따른 차별 없이 외국인을 평등하게 대우한다는 내용의 수정안을 재제출함. 출석 위원 17명 가운데 11명의 찬성을 확보했으나, 의장 우드로 윌슨이 강한 반대가 존재하는 중요 사안에는 만장일치가 필요하다고 판정하면서 채택되지 못함.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빌리 휴즈는 제안이 백호주의 이민정책을 위협할 것으로 보고 영국 대표단 등에 지속적으로 반대 압력을 행사함. 다수의 지지를 얻고도 국제연맹 규약에 인종 평등 원칙을 포함시키는 데 실패한 결정적 사건이 됨.

인종 평등 제안 (1919)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립과 함께 이미 파리에서 독립외교 활동을 벌이던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의 대한민국 대표로 임명함. 김규식은 앞서 2월 1일 상하이를 떠나 3월 13일 파리에 도착해 한국공보국을 설치하고 각국 대표와 언론을 상대로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알리고 있었음. 임시정부의 공식 대표 자격을 부여받으면서 파리에서 진행되던 독립외교 활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으로 연결됨.

파리장서운동 김규식 (우사) 임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