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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사회보
주제

투사회보

鬪士會報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고립된 광주 시민에게 항쟁 상황과 행동 지침을 전한 유인물 형태의 소식지. 제도 언론이 신군부의 검열과 왜곡 보도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윤상원을 비롯한 들불야학 강학들이 시민에게 광주의 실상을 알리고 항쟁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제작한 시민 언론이자 대안 언론.

윤상원의 제안으로 들불야학 구성원들이 제작에 나서 원고 작성과 필경, 등사, 배포를 분담. 윤상원과 전용호 등이 문안을 작성하고 박용준과 동근식이 철필로 등사 원지에 글씨를 옮겼으며, 김성섭·나명관·서대석·이영주 등이 등사 작업에 참여. 원지 한 장으로 일정 부수를 찍은 뒤 글씨가 흐려지면 새 원지에 다시 필경하는 방식으로 제작했으며, 16절지 앞뒤 양면에 항쟁 소식과 집회 일정, 행동강령 등을 담아 매 호 7,000~8,000부가량 배포.

1980년 5월 21일 제1호를 시작으로 5월 25일까지 제8호를 발행한 뒤, 항쟁 지도부 개편과 함께 제작 거점을 광주YWCA로 옮기고 제호를 『민주시민회보』로 변경해 제9호로 발행을 계속함.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광주YWCA 진압 과정에서 박용준이 총격으로 사망하고 제작 중이던 『민주시민회보』 제10호가 전량 압수되면서 발행 종료.

언론과 통신이 통제된 광주에서 시민들이 항쟁의 상황을 공유하고 행동 방향을 확인하게 한 주요 정보 매체이자 시민 공동체 형성의 매개. 박용준이 남긴 필체는 2021년 디지털 글꼴 ‘박용준 투사회보체’로 복원되어, 5·18 당시의 시민 저항과 기록 정신을 상징하는 유산으로 계승.

4 타임라인
3 사실

추가 정보

개요

『투사회보(鬪士會報)』는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간에 광주 시민에게 항쟁 상황과 행동 지침을 전하기 위해 발행된 유인물 형태의 소식지. 신군부의 언론 통제로 지역 신문과 방송이 계엄군의 폭력과 항쟁의 실상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자, 시민들이 직접 정보를 생산하고 유통한 대표적인 시민 언론이자 대안 언론.

피해 상황과 집회 일정, 항쟁 지도부의 입장, 시민 행동강령 등을 실어 외부와 고립된 광주 시민에게 전달. 언론과 통신이 통제된 상황에서 시민들이 항쟁의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공동의 행동 방향을 모색하게 한 주요 정보 매체.

제작과 배포

계엄군의 진압으로 사상자가 발생하는데도 제도 언론이 이를 제대로 보도하지 않자, 윤상원을 비롯한 들불야학 강학들이 녹두서점에 모여 소식지 제작을 결정. 들불야학 강학과 학생, 여성 노동자 등 20여 명이 원고 작성과 필경, 등사, 배포 작업을 분담.

윤상원과 전용호 등이 문안을 작성하고, 글씨가 좋았던 박용준과 동근식이 철필로 등사 원지에 글씨를 옮기는 필경 담당. 김성섭·나명관·서대석·이영주 등은 등사 작업에 참여. 등사 원지 한 장으로 일정 부수를 인쇄하면 글씨가 흐려졌기 때문에 필경 담당자가 같은 원고를 새 원지에 반복해 옮기는 방식으로 제작.

16절지 앞뒤 양면에 항쟁 소식과 홍보 사항, 집회 일정, 행동강령 등을 수록했으며, 매 호 7,000~8,000부가량을 등사해 시민들에게 배포. 들불야학 강학과 학생, 노동자들이 계엄군의 단속을 피해 광천동과 도심 곳곳에서 소식지를 전달.

발행 경과와 종결

1980년 5월 21일 제1호를 배포한 뒤 5월 25일까지 『투사회보』 제8호 발행. 같은 날 항쟁 지도부 개편과 함께 제작 거점을 들불야학 주변의 빈집에서 광주YWCA로 옮기고, 제호를 『민주시민회보』로 변경. 호수는 『투사회보』를 이어 제9호로 발행.

5월 26일 밤부터 제작진이 『민주시민회보』 제10호 제작에 착수했으나,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최후 진압 작전으로 광주YWCA가 공격받으면서 발행 중단. 필경과 등사 작업에 참여하던 박용준이 계엄군의 총격으로 사망하고, 제작 중이던 제10호는 계엄군에게 전량 압수.

역사적 의미

『투사회보』는 언론의 검열과 왜곡에 맞서 시민들이 스스로 항쟁의 기록을 생산하고 유통한 사례. 외부와 고립된 광주에서 계엄군의 진압 상황과 시민 집회, 항쟁 지도부의 지침을 전달함으로써 시민들이 서로의 상황을 확인하고 공동의 행동을 조직하는 데 기여.

손으로 쓴 원고를 등사기로 복제하고 시민들이 직접 배포한 제작 방식은 5·18 당시 형성된 자발적 시민 공동체의 성격을 보여주는 기록. 현재 제1호부터 제9호까지의 원본이 보존되어 있으며,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의 일부로서 항쟁의 실상과 시민 언론 활동을 증언하는 자료.

타임라인

4
1980 3건
46년 전

1980년 5월 21일 녹두서점에 모인 윤상원·정상용·이양현·정현애·김상집 등이 계엄군의 진압과 광주의 참상을 알릴 소식지 발간에 뜻을 모으고, 윤상원이 이끄는 들불야학팀이 제작을 전담하기로 결정. 윤상원이 들불야학 교사 전용호에게 결정을 전달한 뒤 교사와 학생 10여 명을 모아 『투사회보』 제작 착수.

들불야학 구성원들은 원고 작성과 편집, 등사, 배포 작업을 나누어 수행했으며, 박용준은 철야 등사 작업에 참여. 제작진은 단속을 피해 광천동 일대의 빈집과 들불야학 주변을 옮겨 다니며 소식지를 발행하고 시민들에게 배포. 5월 25일 제9호부터 제호를 『민주시민회보』로 변경한 뒤 5월 26일까지 제작을 이어가며, 언론 통제 속에서 항쟁의 상황과 시민들의 요구를 전달한 주요 대안 정보 통로 역할.

1980년 5월 25일 민주시민학생투쟁위원회 결성과 항쟁 지도부 재편 과정에서 소식지 제작 거점을 광주YWCA로 이전하고, 제호를 『투사회보』에서 『민주시민회보』로 변경. 새 제호로 발행한 첫 소식지는 앞선 『투사회보』 제8호의 호수를 이어받은 제9호로 제작.

제호 변경 뒤에도 들불야학 구성원들을 중심으로 한 제작 체계와 소식지의 기능은 계속 유지. 『민주시민회보』는 항쟁 지도부의 입장과 광주의 상황을 시민들에게 전달하며 5월 26일까지 발행.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최후 진압 작전으로 광주YWCA 건물을 공격하면서, 건물 안에서 마지막 소식지를 제작하던 박용준이 총격으로 사망. 계엄군은 제작 중이던 『민주시민회보』 제10호를 압수했으며, 이에 따라 5월 21일 『투사회보』로 시작된 항쟁 소식지 발행도 종료.

언론 통제 속에서 광주의 상황과 항쟁 지도부의 입장을 시민들에게 전달하던 대안 언론 활동이 계엄군의 무력 진압과 함께 중단.

2021 1건
5년 전

2021년 5월 21일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박용준이 『투사회보』 등사원지에 철필로 써 내려간 글씨를 복원한 디지털 글꼴 ‘박용준 투사회보체’ 공개. 『투사회보』 첫 발행 41주년에 맞춰 광주YWCA와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지역공공정책플랫폼 광주로가 시민 모금을 바탕으로 제작.

항쟁 소식지에 남은 박용준의 손글씨를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디지털 서체로 되살려, 그의 삶과 5·18 당시 시민 언론 활동을 기억하려는 작업.

그 외 사실들

기록

  • 『투사회보』는 앞뒤 양면 유인물 형태로 매 호 7,000~8,000부가량이 제작·배포됨.

    출처: 경향신문
  • 『투사회보』는 1980년 5월 21일 제1호부터 5월 25일 제8호까지 발행된 뒤 제9호부터 『민주시민회보』로 제호가 바뀌어 제10호까지 이어짐.

  • 투사회보 - 광주문화예술인문스토리플랫폼

    출처: dh.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