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8월 9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2시간 29분 19초 2의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 당시 넘기 어렵다고 여겨지던 2시간 30분의 벽을 깬 기록이며, 같은 경기에서 남승룡이 3위로 동메달 획득. 한국인이 올림픽에서 처음 따낸 금메달이지만 국적은 일본으로 기재되었고, 시상대에서 월계수 화분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린 모습이 널리 회자.
일장기 말소사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과 동메달을 획득한 남승룡의 시상식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 보도한 조선중앙일보·동아일보의 언론 저항 사건. 조선중앙일보가 8월 13일 두 선수의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먼저 게재했으나 당시 적발되지 않았고, 동아일보가 8월 25일 손기정의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보도하면서 수사와 처분이 본격화됨. 동아일보는 무기정간 후 인사·편집 통제 조건을 수용하고 복간했지만, 뒤늦게 보도가 적발된 조선중앙일보는 자진 휴간 뒤 복간하지 못하고 폐간됨. 식민지 검열이 언론사 인사와 편집권 통제로 확대된 과정을 보여주는 사건.
추가 정보
손기정과 남승룡은 일제강점기 조선인이었지만 일본 대표로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해야 했음. 두 선수의 성과를 민족적 쾌거로 받아들인 한글 신문들이 시상식 사진의 일장기를 제거하거나 흐리게 처리하면서 사건이 시작됨.
두 신문의 보도는 동시에 이루어진 하나의 행동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점과 방식으로 이어진 별개의 보도였음. 조선중앙일보는 1936년 8월 13일 손기정과 남승룡 두 선수의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가장 먼저 게재함. 체육부 기자 유해붕이 사진부원들과 협의해 표식을 삭제했으나, 사진 상태가 좋지 않아 검열 당국이 이를 알아채지 못함.
동아일보도 같은 날 손기정의 일장기가 흐릿한 사진을 실었으나, 남승룡의 표식은 남아 있었고 고의적 수정 여부를 입증하는 기록도 확인되지 않음. 이후 8월 25일 석간 제2판에 손기정의 일장기를 완전히 제거한 사진을 게재했고, 검열관이 이를 발견하면서 발매·배포 금지와 관계자 연행, 언론사 처분으로 사건이 확대됨. 따라서 조선중앙일보의 8월 13일 보도가 최초의 명백한 말소 보도이고, 동아일보의 8월 25일 보도가 수사와 제재를 촉발한 보도에 해당함.
두 신문의 후속 경로도 달랐음. 동아일보는 8월 29일부터 무기정간에 들어갔다가 사장과 주요 간부·관련 사원의 퇴직, 핵심 간부 임명에 대한 사전 승인, 편집·검열 지침 등의 조건을 수용하고 1937년 6월 복간함. 조선중앙일보의 선행 보도는 동아일보 사건 수사 과정에서 뒤늦게 드러났고, 관계자 연행 뒤 같은 처분을 예상해 9월 5일부터 자진 휴간함. 그러나 경영 내분과 재정 문제까지 겹치면서 발행을 재개하지 못했고 1937년 11월 발행 허가의 효력을 상실해 폐간됨.
후대의 대중적 기억은 동아일보와 이길용을 중심으로 형성됐지만, 조선중앙일보와 유해붕의 선행 보도 및 서로 다른 처분 경로를 함께 살펴야 사건의 전체상이 드러남. 사진 한 장의 검열을 넘어 조선총독부가 한글 신문의 인사와 편집 방향에 직접 개입한 전환점이라는 의미를 지님.
타임라인
8조선중앙일보가 1936년 8월 13일자 지면에 손기정과 남승룡의 마라톤 시상식 사진을 게재하면서 두 선수의 유니폼에 있던 일장기를 삭제함. 체육부 기자 유해붕이 사진부원들과 협의해 표식을 지운 것으로 확인됨. 같은 날 동아일보에도 손기정의 일장기가 흐릿하게 나타난 사진이 실렸으나, 남승룡의 표식은 남아 있었고 고의적 수정 여부를 뒷받침하는 기록도 확인되지 않음. 사진 상태가 좋지 않아 검열 당국은 조선중앙일보의 삭제를 알아채지 못함.
동아일보가 1936년 8월 25일자 석간 제2판 2면에 손기정의 마라톤 시상식 사진을 게재하면서 유니폼 가슴의 일장기를 완전히 제거함. 석간 제1판에는 일장기가 그대로 보였으나 제2판에서는 삭제된 상태로 인쇄됨. 운동부장 이길용의 제안으로 화가 이상범이 원본 사진의 표식을 흐리게 했고, 장용서·신낙균·서영호 등 사회부와 사진부 관계자들이 삭제 작업에 관여함. 검열관이 이를 발견하면서 당일 지면의 발매·배포 금지와 관련자 연행으로 이어짐.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1936년 8월 27일 동아일보에 무기정간을 통보함. 동아일보는 이미 인쇄한 8월 28일자를 마지막으로 29일부터 발행을 중단함. 이길용·이상범 등 직접 관련자뿐 아니라 사회부장 현진건과 잡지 편집 관계자 등 다수가 연행되어 취조받음. 총독부가 복간 조건으로 사장 송진우를 비롯한 주요 간부와 관련 사원의 퇴직, 핵심 간부 임명에 대한 사전 승인, 편집 지침 수용 등을 요구하면서 언론사 인사와 지면에 대한 통제로 확대됨.
조선총독부가 동아일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조선중앙일보의 8월 13일자 보도를 확인하고 1936년 9월 1일부터 수사를 시작해 관계자 4명을 연행함. 조선중앙일보는 동아일보와 같은 정간 처분을 예상해 9월 4일자 석간을 마지막으로 5일부터 자진 휴간에 들어감. 이후 경영 내분과 재정 문제 속에서 복간하지 못하고 발행 허가 실효로 이어짐.
동아일보가 장기 정간 끝에 1937년 6월 발행을 재개함. 복간 과정에서 사장 송진우와 주요 간부·사원이 물러나고 백관수가 새 사장으로 선임됨. 조선총독부가 요구한 핵심 간부 임명 사전 승인과 편집·검열 지침을 수용한 결과로, 일장기 말소사건이 개별 기사 제재를 넘어 한글 신문의 인사와 편집 방향을 통제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보여줌. 정간 해제와 복간의 정확한 날짜가 자료별로 6월 1일부터 3일까지 다르게 제시되어 월 단위로 기록함.
조선중앙일보가 1936년 9월 자진 휴간 이후 발행을 재개하지 못한 채 1937년 11월 5일 발행 허가의 효력을 상실함. 일장기 말소 보도에 대한 총독부 수사와 정간 압박에 더해 휴간 중의 경영 내분과 취약한 재정 기반이 겹치면서 사실상 폐간으로 귀결됨.
국가보훈부가 광복 80주년을 맞아 발표한 2025년 월별 ‘이달의 독립운동’ 가운데 8월의 사건으로 일장기 말소사건을 선정함. 개인 중심의 ‘이달의 독립운동가’와 별도로 사건과 단체를 조명하려는 구성으로, 일장기 말소 보도를 일제강점기 언론 저항과 민족의식 고취를 보여주는 독립운동으로 공식 기념한 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