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국민위병을 지휘한 라파예트가 여성들의 행진을 뒤따라 베르사유로 이동함. 시민들의 요구와 왕실 보호 사이에서 질서를 유지해야 했지만, 밤이 지나도록 군중과 왕실 사이의 긴장은 해소되지 않았음. 다음 날 궁전 침입은 무장 병력의 배치만으로 사태를 통제할 수 없었음을 드러냄.
1789년 10월 6일 베르사유에 모인 파리 시민들이 왕실을 압박해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가족이 파리로 이동함.
식량난과 높은 빵값에 항의한 여성들과 시민들은 전날 파리에서 베르사유까지 행진했고, 10월 6일 새벽 궁전이 습격되는 과정에서 왕실은 군중의 요구를 받아들여 파리 튈르리 궁전으로 이동함. 이 사건으로 왕실은 베르사유의 독립적 정치공간을 사실상 상실하고 혁명의 중심인 파리의 직접적인 압력 아래 놓이게 됨.
새벽 군중 일부가 궁전 안으로 들어가 왕비의 거처 쪽으로 향했고 충돌 과정에서 왕실 경호원들이 살해됨. 마리 앙투아네트는 국왕의 거처로 피신했으며 국민위병이 개입해 내부의 군중을 물러나게 함. 식량을 요구한 전체 행진과 궁전 안에서 벌어진 폭력을 구분하되, 이 위기가 왕실의 파리 이동 결정을 재촉했다는 점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음.
국민제헌의회가 파리 대주교관의 큰 회의실에서 회의를 시작함. 왕실이 10월 6일 파리로 이동한 뒤 의회도 뒤따르면서 베르사유에 있던 국가 정치의 중심이 파리로 옮겨졌음. 이날의 임시 회의장 이전은 11월 마네주 정착과 구분되며, 왕실과 의회의 이동이 하루에 동시에 끝난 것은 아니었음.
국민제헌의회가 임시로 사용하던 대주교관을 떠나 튈르리 인근의 실내 승마장인 마네주에서 회의를 열기 시작함. 왕실과 의회, 언론인과 정치클럽이 가까이 모였고 여성과 남성 시민은 방청석이나 청원을 통해 정치에 관여했음. 여성행진이 촉진한 권력 중심의 이동이 지속적인 정치 환경으로 자리 잡은 후속 변화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