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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907년의 기록 3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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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 강화 뒤인 1905년 11월 러시아군 포로 송환이 시작되고, 나라시노 포로수용소가 1906년 1월 폐쇄됨. 수용소 건물과 부지는 이후 나라시노 연습장에 온 일본군 부대의 임시 숙소인 다카쓰 병영으로 이용됨. 1915년 제1차 세계대전기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군 포로 수용으로 이어지는 시설 전환.

나라시노 수용소

1906년 4월 18일 수요일 오전 5시 12분 북부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발생한 진도 7.9 규모의 대지진. 3천 명 이상이 사망했고 도시의 80% 이상이 파괴됨.

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에서 문회명을 대동광문회로 바꾸기 위한 특별회가 열림. 부사장 서상돈이 일본에 대한 국채 1,300만 원을 국민의 힘으로 갚자고 제안하고, 사장 김광제 등 참석자들이 호응함. 김광제는 담뱃대와 담배쌈지를 버리고 3개월치 담뱃값 60전과 별도 의연금 10원을 내놓았으며, 참석자들이 즉석에서 약 2,000원을 모금함. 전국으로 확산된 국채보상운동의 출발점.

국채보상운동

《대한매일신보》가 1907년 2월 21일 「국채일천삼백만원보상취지」를 가장 먼저 게재한 뒤 기사·논설·기고와 의연금 광고를 통해 운동을 지속적으로 알림. 의연자가 급증하자 지면을 확대하고, 명단을 모두 싣지 못할 때에는 별도 부록을 발행해 성명과 금액을 공개함. 언론을 통한 공개 모금이 대구에서 시작된 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핵심 기반이 됨.

국채보상운동

1907년 2월 21일 김광제와 서상돈 등이 작성한 「국채일천삼백만원보상취지」가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됨. 대한제국 국민 약 2,000만 명이 3개월 동안 담배를 끊고 매달 20전씩 모아 일본에 대한 국채 1,300만 원을 갚자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제시함. 대구에서 시작된 제안이 신문을 통해 전국에 알려지고 각지의 단연회와 국채보상단체 결성으로 이어지는 계기.

국채보상운동

1907년 2월 22일 서울에서 김성희·유문상·오영근 등이 국채보상기성회를 조직하고 취지서와 회칙을 마련함. 국민 의연금을 모아 일본에 대한 국채 1,300만 원을 갚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서점·약국·《대한매일신보》사·잡지사 등을 의연금을 받는 수전소로 지정함. 서울에 모금·보관 체계가 마련되면서 각 지역과 계층의 국채보상 조직 결성이 확산됨.

국채보상운동

1907년 3월 15일 서울 대안동 국채보상부인회가 《대한매일신보》에 취지서를 게재하고 전국 여성의 참여를 호소함. 여성도 국가의 혜택을 받는 백성으로서 국채 보상에 참여해야 한다고 밝히고, 신분과 관계없이 의연금을 낸 사람을 회원으로 인정함. 이후 각지에서 부인감찬회·패물폐지부인회·탈환회 등 여성 단체가 조직되고 패물과 생활비를 절약한 돈을 기부하면서 운동의 참여 기반이 확대됨.

국채보상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