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러들럼 출생
미국의 소설가 로버트 러들럼. (~2001년)
미국의 소설가 로버트 러들럼. (~2001년)
미시간주 하이랜드 파크 공장에서 1,500만 번째 모델 T가 출고. 헨리 포드와 그의 아들 에드셀 포드가 이 마지막 차량을 직접 운전하며 기념식 가짐. 이날 이후 포드는 모델 A 생산 설비로 전환하기 위해 약 6개월간 공장 문을 닫음.
참고로 포드 모델 T는 저렴한 가격으로 "미국을 바퀴 위에 올려놓았다(Putting America on wheels)"는 평가를 받음.
대한민국의 군인 김재춘. (~2014년)
폴 볼커가 1927년 9월 5일 미국 뉴저지주 케이프메이에서 태어남. 1949년 프린스턴대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1951년 하버드대 공공행정대학원에서 정치경제·정부학 석사 학위를 취득함. 이후 뉴욕 연방준비은행, 체이스맨해튼은행, 미국 재무부를 거치며 미국 통화정책과 국제금융 질서에 큰 영향을 미친 경제 관료로 성장함.
필로 판즈워스가 샌프란시스코 그린 스트리트의 연구실에서 자신이 개발한 이미지 디섹터 카메라 튜브를 이용해 전자식 텔레비전 영상을 전송하는 데 성공한 사건. 단순한 직선 이미지를 다른 방의 수신기로 보내 재현했으며, 기계식 주사 장치에 의존하지 않는 전자식 텔레비전 기술이 실제로 작동함을 보여준 초기의 결정적 실험.
1927년 10월 6일 워너 브라더스의 《재즈 싱어》가 뉴욕에서 초연됨. 동기화된 노래와 대사를 장편영화에 성공적으로 결합해 유성영화 전환의 상징적 작품이 됨.
《재즈 싱어》는 전편이 유성으로 제작된 영화는 아니지만 Vitaphone 시스템을 사용해 음악·음향효과와 일부 동기화된 대사를 결합함. 흥행 성공은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이 음향영화 제작과 극장 설비 전환에 속도를 내는 계기가 되었고, 무성영화 시대에서 토키 시대로 넘어가는 산업적 전환을 상징하게 됨.
브뤼셀에서 열린 제5차 솔베이 회의에 양자역학을 만든 주역들이 모임. 보어 진영의 코펜하겐 해석을 두고, 양자역학이 불완전하다고 본 아인슈타인이 사고실험으로 도전하고 보어가 반박하는 유명한 논쟁이 벌어짐. 참석한 29명 중 17명이 노벨상 수상자.
팬암이 미국 키웨스트와 쿠바 아바나 사이의 정기 항공우편 운항을 시작함. 앞선 10월 19일에는 우편계약 기한을 맞추기 위해 전세기로 우편을 운송했으므로 두 날짜의 의미를 구별해야 함. 정부의 항공우편 계약은 초기 회사가 지속적으로 운항할 수 있게 한 수입 기반이었음.
서울에서 사망함. 1928년 1월 《매일신보》는 그의 부고에서 ‘내선가정의 성공자’라는 점을 강조해 소개함.
막스 보른의 지도 아래 괴팅겐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함. 당시 괴팅겐은 양자역학 형성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으며, 오펜하이머는 이곳에서 유럽의 주요 이론물리학자들과 교류하며 실험물리학에서 이론물리학으로 연구 방향을 확립함.
영국 수학자 해럴드 대븐포트가 1927년경 생일 문제를 논의한 것이 기록상 가장 이른 사례. 다만 '이미 누군가 제기했을 것'이라 여겨 자신의 발견이라 주장하지 않았고 발표도 하지 않음. 문제의 정확한 기원이 불분명하게 남게 된 배경.
중국 상하이 동제대학을 거쳐 독일로 건너간 이극로가 1927년 베를린대학(현 훔볼트대학)에서 학위를 받음. 유학 중 대학에 한국어 강좌를 열어 우리말을 알리는 데도 힘씀. 서구 학문을 익히고 돌아와 한글운동에 투신하는 밑바탕이 된 시기.
막스 보른과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논문 「분자의 양자론(Zur Quantentheorie der Molekeln)」을 발표함. 원자핵이 전자보다 훨씬 무겁고 느리게 움직인다는 차이를 이용해 두 운동을 분리해 계산하는 접근을 정립함. 이후 보른-오펜하이머 근사로 불리며 분자물리학과 양자화학 계산의 기본적인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됨.
밀른과 셰퍼드가 동시집 《우리는 이제 여섯 살》(Now We Are Six)을 출간함. 푸와 크리스토퍼 로빈의 문학 세계가 산문 이야기뿐 아니라 시와 삽화를 통해 이어졌음.
이 책은 1926년 《곰돌이 푸》의 개정판이 아니라, 네 권으로 묶여 읽히는 밀른·셰퍼드 아동문학 작품군의 별도 저작임.
김우영과 함께 해외여행에 나서 파리에 머물며 그림을 배우고 각국 미술관을 둘러봄. 1929년까지 이어진 여행은 새로운 미술을 접하는 기회였으며, 일본 외교관이었던 남편의 지위가 여행의 조건이 되었음. 파리에서는 약 8개월 동안 머물며 로제 비시에르의 화실에서 수업을 받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