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서울 비공개 피란과 대전 라디오 방송
이승만이 북한군의 서울 진입을 앞두고 수도를 떠나 대전에서 대국민 방송을 함. 전쟁 발발 이후 정부·군의 허위 승전 발표가 이어진 가운데 대통령과 정부의 남하는 시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이튿날 한강교 폭파로 피란은 더욱 어려워졌음.
1950년 6월 27일 새벽 이승만은 북한군이 서울로 접근하는 가운데 수도를 떠났으며, 대구를 거쳐 대전에 도착함. 대통령과 정부 지도부가 먼저 남하한 사실은 당일 미국 외교전문에서도 확인됨. 그러나 시민들에게는 지도부의 철수와 서울의 위급한 상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음. 당시 대전방송국 방송과장 유병은은 후일 회고에서 이승만이 대전의 임시 거처에서 특별방송을 준비하도록 하면서 방송 장소 등을 비밀에 부치고 녹음해 반복 방송하도록 지시했다고 증언함.
정부·군이 전달한 정보는 실제 전황과 어긋났음. 6월 26일 국방부는 국군이 적 주력을 격파하고 계속 북상하고 있다고 발표했으나, 실제로는 의정부가 함락되고 서울 방어선이 위협받고 있었음. 27일 오전 무초 주한 미국대사가 작성한 전문에는 신성모 국무총리 서리 겸 국방장관이 대통령과 각료들의 남하 사실을 전하면서, 자신은 라디오로 국민들에게 집 안에 머물고 전차가 도착하더라도 침착하라고 호소했다고 말한 내용이 남아 있음. 지도부의 피란과 국민에게 전달된 잔류·안심 요구 사이에 뚜렷한 괴리가 있었음.
이승만은 27일 밤 대전에서 라디오 연설을 함. 미국 해외방송정보국(FBIS)의 현존 영문 감청록에는 북한군이 서울 가까이 진격했고 국군의 무기가 부족하다는 설명, 미국의 군사원조 소식, 군과 국민의 분투를 당부하는 내용이 실려 있음. 사람들이 피란처를 찾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는 언급도 있으나, 판독된 부분에는 자신의 피란 사실이나 시민의 구체적인 대피 절차를 알리는 내용이 확인되지 않음. 흔히 알려진 ‘정부가 서울에 남겠다’ 또는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라’는 문구 역시 이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으며, 감청록 말미에는 일부 연설이 판독 불가능했다고 명시되어 있음.
이튿날인 6월 28일 새벽 국군이 한강교를 폭파하고 서울이 북한군에 함락되면서, 제때 떠나지 못한 시민들의 피란은 더욱 어려워졌음. 국민일보가 소개한 1950년 11월 9일 국회 발언에 따르면, 태완선 의원은 서울 수복 뒤 6월 27일의 아침·정오 방송과 국민의 혼란을 거론하며 정부를 비판했음. 이 사건은 대통령의 선행 피란, 정부·군의 전황 오도, 충분한 피란 안내를 받지 못한 시민들의 처지가 함께 드러난 사례로서 이승만 정부의 전쟁 초기 국민 보호 책임과 관련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