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8월 2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이 상하이 프랑스 조계 동익리에서 창간. 이광수가 사장 겸 주필을 맡고, 주요한·이영렬 등이 발간과 운영에 참여함. 상하이 망명 지사들이 국내외 소식과 독립운동 관련 기사를 싣던 등사판 신문 《우리 소식》을 발전시킨 매체로, 민족사상 고취와 독립운동 소식의 국내외 전파를 발간 목표로 제시함.
독립신문 상하이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로 1919년 8월 21일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 늑로(勒路) 동익리(同益里)에서 창간된 국한문 혼용 신문. 초대 사장 겸 주필에 이광수, 편집국장에 주요한, 영업국장에 이영렬이 취임함. 상하이에 망명한 독립지사들이 국내외 소식과 독립운동 기사를 싣던 등사판 신문 《우리 소식》이 발전한 형태이며, 창간 당시 제호는 한자 '獨立'.
민족사상의 고취와 민심 통일, 국민 스스로 운영하는 독립 언론, 임시정부 독려를 사명으로 내세운 항일 언론. 매호 4면을 국한문 혼용·세로짜기로 발행했고, 제9호부터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주 3회(화·목·토) 발행을 원칙으로 함. 한글 활자를 구할 수 없어 조동호가 성경에서 글자를 오려 자모를 만들었으며, 제호는 세 차례 바뀌어 제22호(1919-10-25)부터 '獨立新聞', 제169호(1924-01-01)부터 한글 '독립신문'을 사용. 이광수·주요한이 떠난 뒤 박은식과 윤해가 주필을 잇고, 김승학 사장 시기에는 중국인 독자를 겨냥한 중문판(한문판)까지 발행함.
지대·광고 수입이 거의 없어 만성적 경영난에 시달렸고, 상하이 교민과 국외 독립운동 진영을 잇는 정신적 구심점이자 항일 투쟁 언론의 선봉으로 평가. 폐간 시점은 자료에 따라 엇갈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925년 9월 25일 제189호설을,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우리역사넷 등은 1926년 11월 제198호설을 전함. 2020년 상해판 실물이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근대 항일 언론의 대표 사료.
타임라인
11창간 이래 한자 제호 ‘獨立’으로 제21호까지 발행하던 신문이 제22호인 1919년 10월 25일부터 ‘獨立新聞’으로 제호 변경. 이 한자 제호는 제168호까지 유지되었고, 제169호인 1924년 1월 1일부터 한글 제호 ‘독립신문’으로 다시 변경.
1921년 7월 초 김승학이 『독립신문』 2대 사장에 취임. 초대 사장 겸 주필 이광수와 영업부장 이영렬의 이탈 뒤 일본 영사관의 항의와 프랑스 영사관의 조치로 신문사와 인쇄소가 봉쇄된 상황에서, 안창호와 신문사 해제 방안을 논의하고 프랑스 영사관과 교섭함. 그 결과 음력 5월 말 신문사와 인쇄소가 다시 개방되었고, 사장 김승학·주필 박은식·편집국장 차리석 체제로 운영 기반 재정비.
일본 영사관의 항의와 프랑스 영사관의 조치로 봉쇄되어 제109호(1921년 5월 31일) 뒤 발행이 중단된 『독립신문』이, 1921년 8월 15일 제110호부터 속간. 김승학 사장 취임 뒤 신문사와 인쇄소의 재개방을 거쳐 발행을 재개했고, 김승학 운영기에는 제110호부터 제177호까지 모두 68호 발행.
김승학 운영 아래 『독립신문』 상하이 중문판이 1922년 7월 20일 제1호 발행으로 창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과 한국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중국 사회와 국제 여론에 알리고, 중국인과의 연대를 넓히기 위한 중국어 신문 발간. 국한문판과 병행해 간행되었으며, 1924년 말까지 약 40호 발행.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이 재일 조선인 위문반과 현지 조사원들이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피살자를 총 6,661명으로 집계해 발표. 도쿄 1,781명, 가나가와현 3,999명 등 지역별 희생 규모를 제시한 조사 결과로, 일본 정부가 집계한 233명과 현격한 차이. 시신 인멸과 조사 방해로 정확한 피해 규모 확정에는 한계가 있으나, 현재까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전체 규모를 논할 때 가장 널리 인용되는 당대 조사.
『독립신문』이 1924년 1월 1일 제169호부터 한자 제호 ‘獨立新聞’을 한글 ‘독립신문’으로 변경. 1919년 창간호부터 제21호까지 사용한 ‘獨立’, 제22호부터 제168호까지 사용한 ‘獨立新聞’에 이은 세 번째 제호. 김승학 운영 아래 한인 독자를 위한 국문 표기를 제호에 반영한 변경.
1924년 9월 통의부와 참의부의 갈등 속에서 참의장 채찬이 통의부원들에게 피살된 뒤, 『독립신문』은 10월 4일 제177호에 통의부 비판 사설 「남만사변을 듣고」와 참의부의 통의부 성토문을 게재함. 통의부 측은 11월 7개 단체와 연합해 반임정 선언과 『독립신문』 구독 금지 내용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함. 김승학은 이러한 반발 속에서 1924년 11월 15일 사장직을 사임하고 상하이를 떠남.
상하이에서 1919년 8월 21일 창간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이 1926년 11월 26일 제198호를 마지막으로 폐간. 재정난과 발행 여건의 악화 속에서 약 7년간 이어진 상하이 국한문판 발행 종료. 이후 『독립신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옮긴 뒤 1943년 다시 발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에서 중국어 기관지 『독립신문』 충칭판을 창간. 1926년 상하이판 폐간 뒤 다시 발간된 판본으로, 중국 사회와 연합국 측에 임시정부의 활동·한중 연대·항일전선에서의 역할을 알리는 대외 선전 매체로 활용. 전시기의 물자 부족과 인쇄 여건 제약으로 비정기 발행.
『독립신문』 충칭판이 1945년 7월 20일 제7호 발행.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비정기적으로 간행된 중국어 판본의 마지막 확인 호수로, 임시정부의 대외 활동과 한국광복군 관련 소식, 국제 정세 및 항일전선 관련 기사를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