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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5955건

앙리 타지펠·마이클 빌리그·로버트 번디·클로드 플라망이 참가자들을 점의 수 추정이나 그림 선호처럼 사소한 기준에 따라 최소집단으로 분류하고 익명의 보상 배분 행동을 관찰함. 집단 사이에 기존의 적대감이나 경쟁,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고 참가자가 자신에게 보상을 줄 수도 없는 조건에서도 자기 집단 구성원에게 더 유리하게 보상을 배분하는 내집단 편애 확인. 사회적 범주화만으로도 집단 간 차별적 행동이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사회 정체성 이론 형성의 핵심 실증적 토대 마련.

사회 정체성 접근

앙리 타지펠과 앨런 윌크스가 분류 체계가 양적 판단에 미치는 영향을 선분 길이 판단 실험으로 검증함. 길이가 단계적으로 달라지는 선분을 물리적 크기와 대응하는 두 범주로 구분했을 때,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한 선분 사이의 차이를 범주가 없는 조건보다 더 크게 판단하는 현상 확인. 범주 경계가 연속적인 자극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는 범주화의 강조 효과를 보여준 연구로, 이후 사회적 범주화와 집단 지각 연구로 이어지는 인지적 토대 형성.

사회 정체성 접근

일제가 수양동우회 관계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착수하면서 이광수도 1937년 6월 7일 체포·수감됨. 검거는 이후 서울 본부와 평양·선천·안악 등 각지의 회원으로 확대돼 모두 181명이 붙잡힘. 수양동우회 조직이 사실상 와해되고 이광수의 장기적인 수사와 재판이 시작된 사건.

이광수 (춘원)

이광수가 『개벽』 1922년 5월호에 장편 논설 「민족개조론」을 발표함. 조선 민족의 쇠퇴 원인을 구성원들의 도덕과 성격에서 찾고, 인격 수양·교육·경제적 자립·사회봉사를 통한 전면적 개조를 주장함. 독립보다 민족성 개조와 실력양성을 앞세운 논리로 지식인과 청년층의 강한 비판을 불러온 논설.

이광수 (춘원)

이광수가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학도지원병 지원을 권유하는 활동을 전개함. 도쿄 메이지대학 강당에서 열린 특별지원병 궐기대회 등에 참석하고 일본 각지의 유학생을 상대로 전쟁 참여를 독려함. 조선 청년을 일본군에 동원하려 한 이광수의 전시 친일 협력을 대표하는 활동.

이광수 (춘원)

경성 부민관에서 문인 약 250명이 참여한 조선문인협회 창립식이 열리고 발기인으로 참여한 이광수가 회장에 선출됨. 이광수는 취임사에서 국민문학 건설과 내선일체 구현을 협회의 목적으로 제시함. 이후 전선의 일본군을 위한 위문문 모집과 문예 행사 등 문단 차원의 전쟁 협력을 이끈 친일 문인단체의 출범.

이광수 (춘원)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됐다가 병보석 상태에 있던 이광수가 예심 과정에서 전향을 선언함. 주요한과 함께 전향 의사를 밝히고 조선신궁을 참배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전향자 중심의 시국유지원탁회의에 참석함. 독립운동과 민족운동 경력에서 이탈해 일제의 황민화·전쟁 협력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한 전환점.

이광수 (춘원)

서울의 수양동맹회와 평양의 동우구락부가 통합해 수양동우회를 결성하고 이광수도 발족에 참여함. 두 단체 모두 안창호가 창설한 흥사단의 국내 조직 성격을 지닌 단체로, 인격 수양과 민족문화 건설을 통한 실력양성을 표방함. 이후 기관지 『동광』을 발행하며 교육·계몽 활동을 전개한 조직의 출범.

이광수 (춘원)

이광수가 『동아일보』 1면에 「민족적 경륜」을 5회에 걸쳐 연재함. 정치·산업·교육 분야의 결사를 조직하고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에서 민족의 당면한 권리와 이익을 확보하자고 주장함. 식민 지배를 인정하는 타협적 자치론이라는 비판과 동아일보 불매운동을 불러왔으며, 이광수가 동아일보사를 떠나는 계기가 된 논설.

이광수 (춘원)

1924년 「민족적 경륜」을 둘러싼 논란으로 동아일보사를 떠났던 이광수가 1926년 11월 8일 편집국장으로 취임함. 이후 편집 책임자로 근무하는 한편 「마의태자」·「단종애사」·「이순신」·「흙」 등의 소설을 『동아일보』에 연재.

참고로 1923년 5월 16일 ‘촉탁기자’로 발령받아 12월 1일자로 ‘임(任) 기자’가 됐고 1926년과 29년 두 차례에 걸쳐 4년 6개월 여를 편집국장으로 재임.

이광수가 1월 31일 고베를 거쳐 상하이로 건너가 영문 2·8 독립선언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윌슨·클레망소·로이드 조지 등에게 전문으로 보냄. 또한 상하이 영자신문에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을 보도하도록 요청하며 한국의 독립 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리려 한 활동.

이광수 (춘원)

이광수가 1917년 1월 1일부터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을 연재함. 작품은 6월 14일까지 총 126회에 걸쳐 게재되고, 1918년 단행본으로 간행됨. 언문일치에 가까운 문체와 근대적 서사, 인물 심리 묘사가 포함된 한국 근대문학사상 최초의 장편소설.

이극로가 독일 유학 중이던 1923년 베를린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현 훔볼트대학)에 유럽 최초의 조선어 강좌를 개설하고 무보수로 약 3년간 우리말을 가르침. 이광수의 《허생전》을 한글 교재로 만들어 활용했으며, 이 교재는 오늘날까지 대학 도서관에 보관됨. 서양에서 이뤄진 한국어 교육의 효시로 평가됨.

이극로 허생전 강좌 교재로 사용된 작품

이광수가 장백산인이라는 필명으로 『동아일보』에 《허생전》 연재를 시작함. 박지원의 동명 작품을 바탕으로 허생의 상업 활동과 이상 공동체 건설, 사회 개혁 구상을 대화와 사건 중심의 장편 서사로 확장한 고전 개작.

안창호로부터 흥사단의 국내 조직을 결성할 사명을 받고 귀국한 이광수가 김종덕·박현환·김윤경·강창기 등과 함께 서울에서 수양동맹회를 결성함. 청년 남녀의 인격 수양과 민족의 실력 배양을 표방한 국내 흥사단 계열 조직으로, 1926년 평양의 동우구락부와 합동해 수양동우회로 발전.

이광수 (춘원) 창립 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