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벤트 18,099

정렬

편집일 기준 · 한국 시간

20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승만은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떠남. 그는 생전에 귀국하지 못하고 1965년 현지에서 사망했음.

1960년 5월 29일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하와이로 출국했음. 그는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4월 28일 경무대를 떠나 서울의 사저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긴 상태였음. 출국은 4월혁명으로 집권이 끝난 이후의 일이며, 대통령 재임 중의 해외 방문과 구별됨.

이승만의 하와이 체류는 장기화되었고, 그는 생전에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음.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사망한 뒤에야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왔음. 국가기록원은 이 시기를 망명으로 설명함.

이승만 대통령이 5월 1일 국제노동절을 공산주의 선전과 연결하여 비판하고, 이와 구별되는 노동자의 기념일을 정하도록 지시함. 국가기록원에 소개된 시정명령은 반공주의가 노동자의 기념일과 노동운동을 재편하는 기준으로 작용한 사실을 보여 줌.

이 지시에 따라 대한노총은 1958년 제11차 전국대의원대회에서 단체 결성일인 3월 10일을 노동절로 정했음. 1957년의 대통령 지시와 1958년 노동단체의 결정은 구별됨. ‘근로자의 날’이라는 명칭의 법제화는 이후 1963년에 이루어졌음.

제주4·3 진압 과정에서 이승만이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음. 정부수립 이후의 강경 진압과 민간인 집단희생에 대한 대통령의 책임을 보여주는 주요 사건임.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은 대통령령 제31호로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제주 주둔 제9연대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지정했음. 제주4·3은 1947년 3·1절 경찰 발포와 뒤이은 탄압,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의 봉기 등 미군정기의 사건에서 시작됨.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의 발발 과정과, 8월 15일 이후 이승만 정부가 수행한 진압은 시기와 지휘체계를 구분해야 함.

정부수립 후에는 제9연대장 송요찬의 중산간 통행금지 포고, 마을 소개와 소각, 재판 없는 주민 살해가 확대됨. 이승만은 19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제주와 전남 사건을 철저히 진압하고 가혹한 탄압으로 법의 권위를 세우라는 취지의 강경 방침을 밝힘. 계엄은 1948년 12월 31일 해제되었으나 주민 집단희생은 이후에도 계속됨.

정부의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강경 작전을 수행한 제9연대장과 제2연대장에게 1차 책임을, 계엄 선포와 강경작전 지시를 한 이승만에게 최종 책임을 귀속했음. 이는 대통령의 확인된 정책 지시와 통수 책임에 대한 판단으로, 개별 마을 학살의 현장 명령을 모두 대통령이 직접 내렸다는 뜻과는 구별됨. 보고서는 미군정과 미군사고문단의 책임, 무장대의 민간인 살해도 지적했으며, 전 기간의 인명 피해를 잠정적으로 2만 5천~3만 명으로 추정했음.

서울 중앙청 앞 광장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의 취임식이 열림. 7월 20일 국회에서 선출된 뒤 열린 취임식으로, 8월 15일의 정부 수립 선포와는 별개의 절차임.

이승만은 취임사에서 대통령으로서의 책임, 정부 조직, 국가 재건과 국제사회와의 관계를 설명했음. 헌법과 국회에 근거한 신생 정부의 출범이라는 의미가 있었으나, 남북을 포괄하는 통일정부가 성립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취임이었음.

제헌헌법에 따라 국회가 무기명투표로 초대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함. 대통령 선거에는 재적의원 198명 중 196명이 참여해 이승만이 180표, 김구가 13표, 안재홍이 2표를 얻었고 무효표는 1표였음.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됨.

부통령 선거는 출석 197명 가운데 1차 투표에서 이시영이 113표를 얻었으나 당선에 필요한 득표수에 미달해 다시 투표했으며, 2차 투표에서 133표를 얻어 당선됨. 당시에는 별도 후보자 등록 없이 의원이 이름을 적는 방식이어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불참 의사를 밝힌 김구에게도 표가 나왔음. 선출일은 7월 20일, 정·부통령 취임식은 7월 24일이며 정부 수립 선포는 8월 15일로 구별됨.

대통령 선거 결과는 이승만 180표, 김구 13표, 안재홍 2표, 무효 1표로 총 196표임. 서재필을 적은 1표는 외국 국적 취득을 이유로 무효 처리됨.

부통령 선거 1차 투표는 이시영 113표, 김구 65표, 조만식 10표, 오세창 5표, 장택상 3표, 서상일 1표였음. 2차 투표에서 이시영 133표, 김구 62표, 그 밖의 인물 1표, 무효 1표가 나왔음. 이시영의 133표는 첫 투표 결과가 아니라 당선이 결정된 두 번째 투표의 결과임.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90세로 사망했음. 7월 27일 국내에서 가족장이 치러졌고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됨.

1965년 7월 19일 대한민국 제1·2·3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90세로 사망했음. 그는 1960년 4월혁명 이후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같은 해 5월 29일 하와이로 떠나 체류하고 있었음.

장례는 1965년 7월 27일 고국에서 가족장으로 거행되었고, 유해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됨. 국가기록원은 사망과 장례행렬에 관한 사진 및 장례 관련 문서를 보존하고 있음.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미국에 있던 이승만이 국무총리로 선출됨.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선출했음. 전날 시작된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내세운 임시헌장을 채택한 결과였음. 당시 이승만은 미국에 있었으므로 상하이 현장에서 정부 수립 회의를 주도하거나 곧바로 현지에 부임한 것은 아니었음.

임시헌장은 국민의 평등과 여러 자유, 선거권과 피선거권, 교육·납세·병역의 의무 등을 규정했음. 이승만의 선출은 미국을 무대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를 신생 임시정부의 지도부에 포함시킨 결정이었음. 이때의 직책은 국무총리였고,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은 같은 해 9월 여러 임시정부 계통의 통합과 정부 조직 개편을 추진하는 과정에서였음.

이승만

2023년 10월 3일 미국 하원이 하원의장직 공석 결의안을 가결하면서 케빈 매카시가 의장직에서 해임됨.

미 하원은 H.Res.757을 216대210으로 가결해 의장직을 공석으로 선언함. 현직 하원의장이 하원 표결로 의장직에서 해임된 첫 사례였으며, 이후 마이크 존슨이 새 의장으로 선출될 때까지 22일간 의장직 공석이 이어짐.

1918년 10월 3일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 불가리아의 페르디난트 1세가 퇴위하고 아들 보리스 3세가 왕위를 계승함.

불가리아가 살로니카 휴전으로 전쟁에서 이탈한 뒤 군주제의 책임 문제가 불거졌고, 페르디난트 1세는 아들 보리스에게 왕위를 넘김. 보리스 3세는 전후 정치·경제적 혼란 속에서 재위를 시작해 1943년 사망할 때까지 불가리아를 통치함.

1961년 10월 3일 CBS에서 시트콤 《딕 밴 다이크 쇼》가 첫 방송됨.

칼 라이너가 만든 이 작품은 텔레비전 코미디 작가 롭 페트리의 직장과 가정생활을 함께 다루며 당시 시트콤의 형식과 대사 중심 코미디에 큰 영향을 줌. 딕 밴 다이크와 메리 타일러 무어가 주연을 맡았으며 1966년까지 방영됨.

1951년 10월 3일 뉴욕 자이언츠의 바비 톰슨이 브루클린 다저스를 상대로 9회말 끝내기 3점 홈런을 쳐 내셔널리그 우승을 결정함.

내셔널리그 우승 결정 3차전에서 자이언츠는 9회말까지 1대4로 뒤지고 있었으나 추격에 성공했고, 톰슨이 랠프 브랑카를 상대로 역전 끝내기 홈런을 기록함. ‘Shot Heard ’Round the World’로 불린 이 장면은 야구뿐 아니라 라디오 중계와 미국 대중문화의 상징적 순간으로 남음.

1986년 10월 3일 서대서양에서 초계 중이던 소련 전략핵잠수함 K-219의 탄도미사일 발사관에서 폭발과 화재가 발생함.

해수가 미사일 발사관으로 유입되면서 연료와 산화제가 반응해 폭발이 발생했고 잠수함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짐. 승조원들은 원자로 정지와 비상 대응을 수행했으나 인명피해가 발생했으며, K-219는 며칠 뒤 침몰함. 냉전기 전략핵잠수함의 운용 위험과 핵안전 문제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고.

1929년 10월 3일 세르브·크로아트·슬로벤 왕국의 공식 국명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변경됨.

알렉산다르 1세의 왕권 강화와 국가 통합 정책 아래 기존 국명이 ‘유고슬라비아’로 바뀌면서 국가 정체성을 단일한 유고슬라비아 개념으로 재편하려는 시도가 공식화됨. 이 체제는 제2차 세계대전기까지 이어졌으며 이후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 성립의 전사에 해당함.

1913년 10월 3일 미국의 세입법이 승인되어 연방 개인소득세 시행의 법적 기반이 마련됨.

같은 해 발효된 수정헌법 제16조가 연방정부의 소득세 부과 권한을 명확히 한 뒤, 1913년 세입법은 개인소득세를 실제 세제로 구현함. 동시에 관세를 인하해 미국 연방재정이 관세 중심에서 소득세를 중요한 세원으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됨.

2021년 10월 3일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 세계 각국 언론이 판도라 페이퍼스 공동 보도를 공개함.

조사는 14개 역외 서비스 업체에서 유출된 1,190만 건 이상의 문서와 약 2.94TB 규모의 자료를 바탕으로 진행됨. 정치인·고위 공직자·부유층 등의 역외 법인과 신탁, 자산 보유 구조를 추적하며 국제 조세·금융 투명성 논의를 크게 확산시킴.

2013년 10월 3일 이탈리아 람페두사섬 인근에서 유럽으로 향하던 난민·이주민 선박이 침몰해 368명이 사망함.

리비아를 출발한 선박에는 주로 에리트레아 출신 난민·이주민이 타고 있었으며, 화재와 전복으로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함. 이 참사는 중앙지중해 이주 경로의 위험성과 유럽의 해상 구조·난민 정책 문제를 상징하는 사건이 됐고, 이탈리아는 이후 10월 3일을 관련 추모의 날로 지정함.

1985년 10월 3일 NASA의 우주왕복선 아틀란티스가 STS-51J 임무로 처음 발사됨. 미 국방부 탑재물을 운반한 군사 임무로, 아틀란티스의 장기간 운용 역사가 시작된 비행.

아틀란티스는 NASA 우주왕복선 함대의 네 번째 궤도선으로, 이날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발사되어 약 4일간 임무를 수행함. 이후 갈릴레오·마젤란 탐사선 발사와 미르·국제우주정거장 임무 등 여러 주요 우주 프로그램에 투입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