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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출생
1891년 10월 11일 전라도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에서 출생함. 음력으로는 9월 9일에 해당함.
초대 부통령 이시영의 사임에 따라 부산 피난지에서 국회가 실시한 제2대 부통령선거에서 3차 결선투표 끝에 김성수가 78표를 얻어 당선됨. 이갑성 73표, 기권 1표.
김성수 사망
1955년 2월 18일 서울에서 숙환으로 사망함. 장례는 2월 24일 국민장으로 거행됨.
조선 침공을 지시하고 전쟁을 주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함. 일본 지도부는 그의 사망 뒤 조선 주둔군의 철수를 추진했고 임진왜란이 종결 단계로 들어감.
조·명 연합군, 사로병진작전 전개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울산·사천·순천 등 남해안 일본군 거점을 여러 방면에서 동시에 압박하는 공세를 전개함. 정유재란 후반 일본군을 남해안 왜성에 묶어두고 철수 단계로 몰아가는 작전이 됨.
조·명 연합군이 울산의 일본군 거점을 포위·공격함. 성을 완전히 함락하지는 못했으나 정유재란 후반 일본군이 남해안 왜성을 중심으로 방어하는 전선 구조가 뚜렷해짐.
정유재란에서 북상하던 일본군과 명군이 직산 일대에서 충돌함. 일본군의 충청도 이북 진출이 저지되면서 전선이 다시 남쪽으로 밀려나는 계기가 됨.
일본군, 남원성 함락
정유재란에서 일본군이 남원성을 포위해 조·명 연합 수비군을 격파하고 성을 함락함. 전라도 내륙 방어선이 크게 흔들리며 일본군이 전주와 충청도 방면으로 북상할 수 있는 길이 열림.
칠천량 해전
원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함. 조선 수군의 주력 전력이 무너지고 일본군이 정유재란 초기 남해의 해상 주도권을 확보하게 됨.
일본군 재침으로 정유재란 시작
명·일 강화교섭이 결렬된 뒤 일본군이 다시 대규모로 조선을 침공함. 일본군은 전라도 점령을 주요 목표로 삼았으며 임진왜란의 두 번째 대규모 전쟁 단계인 정유재란이 시작됨.
제2차 당항포 해전 발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당항포 일대의 일본 선단을 공격함. 1594년에도 남해에서 조선 수군이 해상 주도권을 유지한 전투 가운데 하나임.
대규모 일본군이 진주성을 포위·공격해 성을 함락함. 김천일·최경회·황진 등 관군과 의병이 항전했으나 많은 군민과 함께 희생되었으며, 1592년 1차 전투의 패배를 만회하려는 일본군의 대규모 공세로 기록됨.
일본군, 한양에서 철수
평양성 패전과 조선 관군·의병·수군의 압박, 명군의 남하가 이어지는 가운데 일본군이 한양에서 철수해 남해안 방면으로 이동함. 전선이 남부 지역으로 축소되고 명·일 강화교섭이 진행되는 계기가 됨.
행주대첩
권율이 지휘한 조선군이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을 격퇴함. 평양성 탈환 이후 한양 주변의 일본군을 압박한 대표적 승전으로 기록됨.
벽제관 전투
평양을 탈환한 뒤 남하하던 이여송의 명군이 벽제관 일대에서 일본군과 충돌해 패배함. 명군의 한양 진격이 둔화되고 이후 명과 일본 사이의 강화교섭이 본격화되는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됨.
조·명 연합군, 평양성 탈환
이여송이 지휘한 명군과 조선군이 평양성을 공격해 일본군을 물리치고 평양을 되찾음. 일본군의 북상 기세를 꺾고 조·명 연합군의 본격적인 남하 반격이 시작된 전환점이 됨.
명·일 강화교섭 진행과 결렬
일본군의 남해안 후퇴 뒤 명과 일본 사이에서 강화교섭이 장기간 진행됨. 조선의 입장과 명·일 양측의 요구가 엇갈린 가운데 교섭이 결렬되면서 1597년 일본군의 재침으로 이어짐.
조선, 훈련도감 설치
임진왜란에서 기존 군사제도의 한계가 드러나자 조선이 중앙군영인 훈련도감을 설치함. 포수·살수·사수의 삼수군 체제를 중심으로 군사를 훈련하고 급료를 지급하는 새로운 상비군 운영의 기반이 마련됨.
김시민이 지휘한 진주성 수비군과 의병이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냄. 경상우도와 전라도로 이어지는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한 임진왜란 초기 육상전의 대표적 승전 가운데 하나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