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을 탈환한 뒤 남하하던 이여송의 명군이 벽제관 일대에서 일본군과 충돌해 패배함. 명군의 한양 진격이 둔화되고 이후 명과 일본 사이의 강화교섭이 본격화되는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됨.
조·명 연합군, 평양성 탈환
이여송이 지휘한 명군과 조선군이 평양성을 공격해 일본군을 물리치고 평양을 되찾음. 일본군의 북상 기세를 꺾고 조·명 연합군의 본격적인 남하 반격이 시작된 전환점이 됨.
권율이 지휘한 조선군이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을 격퇴함. 평양성 탈환 이후 한양 주변의 일본군을 압박한 대표적 승전으로 기록됨.
일본군, 한양에서 철수
평양성 패전과 조선 관군·의병·수군의 압박, 명군의 남하가 이어지는 가운데 일본군이 한양에서 철수해 남해안 방면으로 이동함. 전선이 남부 지역으로 축소되고 명·일 강화교섭이 진행되는 계기가 됨.
대규모 일본군이 진주성을 포위·공격해 성을 함락함. 김천일·최경회·황진 등 관군과 의병이 항전했으나 많은 군민과 함께 희생되었으며, 1592년 1차 전투의 패배를 만회하려는 일본군의 대규모 공세로 기록됨.
조선, 훈련도감 설치
임진왜란에서 기존 군사제도의 한계가 드러나자 조선이 중앙군영인 훈련도감을 설치함. 포수·살수·사수의 삼수군 체제를 중심으로 군사를 훈련하고 급료를 지급하는 새로운 상비군 운영의 기반이 마련됨.
명·일 강화교섭 진행과 결렬
일본군의 남해안 후퇴 뒤 명과 일본 사이에서 강화교섭이 장기간 진행됨. 조선의 입장과 명·일 양측의 요구가 엇갈린 가운데 교섭이 결렬되면서 1597년 일본군의 재침으로 이어짐.
이순신,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
조정이 전라·경상·충청의 수군을 통합 지휘할 삼도수군통제사를 신설하고 이순신에게 전라좌수사와 겸임하도록 함. 여러 수사가 협력하던 연합작전에 통일된 지휘권을 부여한 제도적 변화였음. 한산도 진영을 중심으로 해상 방어를 지속하는 과정에서 함대 간 명령과 작전을 조정하는 기반이 됨.
이순신, 한산도로 수군 진영 이전
이순신이 한산도로 수군 진영을 옮겨 일본군의 해상 움직임을 감시하고 호남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는 거점으로 삼음. 선조수정실록에는 한산도가 배를 숨기고 주둔하기에 적합하다는 이전 요청과 조정의 허락이 기록되어 있음. 해도 둔전의 설치를 추진하는 등 장기간 함대와 병력을 유지하기 위한 군량 확보도 중요한 과제가 되었음.
선조의 정릉동 행궁 사용 시작
임진왜란 중 피란에서 돌아온 선조가 월산대군 후손의 집을 임시 궁궐로 사용하기 시작함. 경복궁과 창덕궁 등 도성의 궁궐이 불탄 상황에서 국왕과 조정이 머물 곳을 마련한 조치. 정릉동 행궁으로 불린 이 공간이 오늘날 덕수궁으로 이어지는 출발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