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에 선출
안창호가 미주 한인 독립운동의 대표적 통합 조직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에 선출됨. 흥사단을 통한 인재 양성과 함께 대한인국민회를 기반으로 재미 한인사회의 조직화와 독립운동 지원을 이끌게 됨.
안창호가 미주 한인 독립운동의 대표적 통합 조직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에 선출됨. 흥사단을 통한 인재 양성과 함께 대한인국민회를 기반으로 재미 한인사회의 조직화와 독립운동 지원을 이끌게 됨.
경성부윤의 자문기구이자 일제 식민통치의 지방행정 보조기구였던 경성부협의회의 관선 협의회원으로 1914년, 1918년, 1920년 세 차례 임명됨.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함. 귀국 뒤 교육·기업 경영 활동에 참여하는 계기가 됨.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해에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으며, 1901년 첫 시상 이후 처음으로 해당 연도의 상이 수여되지 않음. 1915년과 1916년에도 수상자가 없었고, 1917년에는 포로·부상병과 가족을 돕는 활동을 인정받은 국제적십자위원회가 예외적으로 수상함. 1918년에는 다시 수상자 없이 넘어간 전쟁기. 전쟁 기간 내내 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며, 외교적 평화의 붕괴 속에서도 인도적 구호가 평화 활동으로 인정된 사례.
컬럼비아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학계의 제안 대신 증권업을 선택함.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사정 속에서 시작한 실무 경험이 훗날 투자 분석과 강의의 기반이 됨.
매수자 부족 등으로 주거단지 공사가 중단됨. 계획했던 60채 가운데 주택은 두 채만 지어졌으며, 이후 시가 매입해 공공 공간으로 바꾸는 계기가 됨.
다른 건축 작업에서 물러나 성당 건설에 집중하기 시작함. 사망할 때까지 남은 생애를 이 프로젝트에 바침.
도쿄 유학생 잡지 《학지광》에 「이상적 부인」을 발표함. 미술을 배우던 시기부터 여성의 삶과 사회적 기대를 글의 주제로 다루기 시작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