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상하이에서 창간
1919년 8월 2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이 상하이 프랑스 조계 동익리에서 창간. 이광수가 사장 겸 주필을 맡고, 주요한·이영렬 등이 발간과 운영에 참여함. 상하이 망명 지사들이 국내외 소식과 독립운동 관련 기사를 싣던 등사판 신문 《우리 소식》을 발전시킨 매체로, 민족사상 고취와 독립운동 소식의 국내외 전파를 발간 목표로 제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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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8월 2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이 상하이 프랑스 조계 동익리에서 창간. 이광수가 사장 겸 주필을 맡고, 주요한·이영렬 등이 발간과 운영에 참여함. 상하이 망명 지사들이 국내외 소식과 독립운동 관련 기사를 싣던 등사판 신문 《우리 소식》을 발전시킨 매체로, 민족사상 고취와 독립운동 소식의 국내외 전파를 발간 목표로 제시함.
파리에서의 외교 활동을 마친 김규식이 미국 워싱턴에 도착해 구미위원부 초대 위원장으로 활동. 미국 정부와 정치인들을 상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고,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독립공채 자금을 모집해 임시정부에 전달.
이승만이 집정관총재 명의의 공포문으로 구미위원부를 설치했음. 구미 각국을 상대로 독립 외교와 선전, 자금 모집을 수행하기 위한 기관이었음.
1919년 8월 25일, 이승만은 집정관총재 공포문 제2호에 따라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했음.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라는 지위에 근거한 조치였으며, 파리에서 독립 외교를 펼친 김규식이 위원장을 맡음. 이 조직은 한국의 독립과 임시정부의 존재를 미국과 유럽에 알리는 외교 창구로 활동했음.
구미위원부는 미국 정부와 의회에 청원하고, 간행물과 강연을 통해 일본의 식민통치를 비판했으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음. 미국의 여론과 정책에 영향을 미쳐 한국 문제를 국제정치의 의제로 만들려는 이승만의 외교독립 노선이 조직 형태를 갖춘 것임.
한편 구미위원부의 설치 절차와 운영, 미주에서 모인 재정의 처리 문제는 상하이 임시정부와 갈등을 일으켰음. 1925년 이승만 면직 뒤 임시정부는 폐지를 결정했으나 이승만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활동을 계속했음. 이후 1941년 설치된 주미외교위원부는 임시정부가 공포한 별도 규정에 근거한 기관이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