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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의 기록 7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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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월 6일 일본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이 웅변회를 개최하고 구체적인 독립운동에 나서기로 결의함. 회의 참가자들은 최팔용, 송계백, 김도연 등 실행위원 10명을 선정하고 독립선언 발표 및 일본 정부와 각국 외교공관에 대한 전달 방안을 논의함. 이 움직임은 2월 8일 도쿄의 조선청년독립단이 발표한 2·8 독립선언을 준비하는 핵심 단계였으며, 이후 3·1운동의 국제적 배경과도 연결됨.

1919년 1월 18일 제1차 세계대전 승전 연합국 대표들이 파리에 모여 강화 조건과 전후 국제 질서를 논의하는 회의를 개막. 미국 윌슨·프랑스 클레망소·영국 로이드 조지·이탈리아 오를란도의 '4대 거두'가 핵심 결정을 주도. 20세기 전반 국제 질서의 틀을 짠 거대한 외교 무대의 출발.

인종 평등 제안 (1919)

대한제국 초대 황제이자 조선 제26대 국왕인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함. 갑작스러운 죽음 뒤 일본에 의한 독살설이 퍼져 반일 여론이 높아졌으며, 국장을 앞두고 서울로 모인 사람들의 움직임이 3·1운동의 사회적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됨. 독살설의 유포와 실제 사인을 동일시할 수는 없으며, 고종 사후에는 덕수궁의 궁역 축소와 전각 철거가 더욱 진행됨.

삼일절 덕수궁 기미독립선언서

재일 조선인 유학생 실행위원들이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작성에 착수. 백관수·김도연·이광수가 기초위원으로 선출되고, 실제 선언서 문안은 이광수가 전담한 것으로 알려짐. 완성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한국어·일본어·영어로 마련하며 도쿄에서 독립을 선포하기 위한 조직과 문건을 갖춘 단계.

이광수 (춘원) 기초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이 일본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조선청년독립단 이름으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 집회에는 약 600명이 참석했으며, 선언식 뒤 약 400명이 가두시위를 시도했으나 일본 경찰의 저지와 강제 해산으로 주동자들이 검거됨. 선언서와 관련 문건은 같은 날 일본 정부와 의회, 각국 외교 공관과 언론사 등에 발송되었으며, 국내 독립운동 세력에 자극을 주어 3·1운동 준비를 촉진한 선도적 사건으로 평가.

삼일절 기미독립선언서 이광수 (춘원) 기초

천도교 측 최린의 요청을 받은 최남선이 독립선언서 본문과 함께 파리강화회의 대표들에게 보내는 청원서, 일본 정부에 대한 통고문 등을 1919년 2월 20일 무렵 완성함. 당대의 이름난 문장가였으나 후환을 우려해 민족대표 명단에는 서명하지 않음. 선언서 끝에 붙은 공약 3장의 작성자를 두고는 최남선 단독설과 한용운 관여설이 함께 전해짐.

일본 전권위원 마키노 노부아키가 국제연맹 규약 위원회에 인종 평등 수정안을 정식 제출함. 연맹 회원국 국민인 외국인에게 인종이나 국적을 이유로 법률상·사실상 차별을 두지 않고 평등하고 공정한 대우를 부여하자는 원칙을 제시한 내용. 즉각적인 제도 통일보다는 원칙을 선언하고 구체적 실행을 각국 정부에 맡기는 구상으로 설명했으나 위원회에서 채택되지 못함.

인종 평등 제안 (1919)

인종 평등 조항이 빠진 국제연맹 규약 초안이 예비 강화 회의 본회의에 보고되자 마키노 노부아키가 발언에 나섬. 이날 규약 내용에 대한 토론이 예정되지 않았음을 들어 즉각 논의를 요구하지 않고, 일본 측 제안을 후속 논의 단계에서 다시 제출해 각국 대표의 검토를 요청하겠다는 뜻을 밝힘. 제안을 철회하지 않고 추후 재상정할 방침을 공식화한 것으로, 4월 11일 인종 평등 수정안 재제출로 이어짐.

인종 평등 제안 (1919)

경남 거창에 있던 곽종석의 문인 윤충하가 파리강화회의에 유림 대표 명의의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자고 제안함. 청원 방식은 한국의 독립 의사를 국제 여론에 호소하는 방안으로 설정됨. 유림계의 독립청원 논의가 곽종석을 중심으로 구체화됨.

파리장서운동

이승만과 정한경이 장래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두어 달라는 청원서를 보냄.

1919년 2월 25일, 이승만과 정한경이 대한인국민회 대표 명의로 파리강화회의에 청원서를 작성했음.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에게도 같은 취지의 서한을 보냄. 파리행 여권을 얻지 못한 두 사람은 서면으로 일본의 한국 지배가 부당하다고 호소하고, 장래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 아래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제안했음.

청원은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국제적 보장을 거쳐 독립에 이르겠다는 단계적 외교방안이었음. 그러나 즉각적이고 완전한 독립을 지향하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다른 외부 통치를 스스로 요청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강한 비판을 불렀음. 이승만이 임시정부 지도자로 선출된 뒤에도 위임통치 청원 문제는 그의 지도력과 외교노선을 둘러싼 갈등의 중요한 쟁점으로 남았음.

문서가 작성된 때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전이었음. 청원은 뒤에 세워진 임시정부 명의가 아니라 대한인국민회 대표 명의로 이루어짐. 청원의 내용과 작성 사실은 원문으로 확인되지만, 그것이 현실적인 차선책이었는지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훼손한 선택이었는지는 평가가 갈림.

손병희를 중심으로 한 천도교계가 기독교의 이승훈, 불교의 한용운 등과 손잡아 종교계 연합 전선을 구성함. 천도교 15인·기독교 16인·불교 2인 등 모두 33인이 민족대표로 서명하기로 하고 손병희를 총대표로 추대함. 유림 측의 참여 교섭은 시간이 촉박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함.

기미독립선언서

천도교가 경영하던 보성사 인쇄소에서 사장 이종일이 독립선언서 약 2만 1천 부를 비밀리에 인쇄함. 2월 27일 밤 급박하게 진행되었으며, 인쇄 도중 종로경찰서 형사에게 발각될 뻔한 위기를 넘김. 완성된 인쇄본은 2월 28일부터 3월 1일에 걸쳐 천도교·기독교·불교 조직과 학생들을 통해 전국으로 배포됨.

이광수가 1월 31일 고베를 거쳐 상하이로 건너가 영문 2·8 독립선언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윌슨·클레망소·로이드 조지 등에게 전문으로 보냄. 또한 상하이 영자신문에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을 보도하도록 요청하며 한국의 독립 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리려 한 활동.

이광수 (춘원)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한국의 독립을 선언함.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시민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섬. 비폭력 만세 시위로 시작된 이날의 선언이 전국으로 번지는 3·1운동의 출발점.

3·1 독립선언

천도교·기독교·불교 세 종교계가 연합해 추진한 민족대표 33인은 당초 탑골공원에서 독립을 선언하려 했으나, 유혈 충돌을 피하기 위해 장소를 인사동 음식점 태화관으로 옮김. 1919년 3월 1일 오후 이곳에 모인 대표들은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만세를 부르고 스스로 일제 경찰에 연락해 체포됨.

한편 같은 날 탑골공원에는 학생과 시민 수천 명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에 나섬.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의 함성은 곧 평양·의주 등 전국으로, 나아가 국외 한인 사회로까지 들불처럼 번져 거족적 항쟁으로 발전함.

1919년 3월 1일 시작된 3·1운동에서 전국의 시위 군중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침. 일제가 금지한 태극기를 거리에 내건 행위 자체가 독립 의지의 표현이었고, 이를 계기로 태극기는 광복 이전까지 한국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굳어짐. 같은 해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태극기를 국기로 계승함.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으로 자리를 옮긴 가운데,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과 시민 앞에서 정재용이 팔각정 단상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함. 낭독이 끝나자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와 서울의 만세시위가 시작됨. 이 시위를 신호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국 각지로 들불처럼 번진 3·1운동의 출발점.

기미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3인은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함. 당일 태화관에는 29명이 모여 선언식을 진행한 뒤 일본 경찰에 연행됨. 독립운동 준비 과정에서 유림계에도 참여가 요청됐으나 곽종석의 회신이 늦어 민족대표에 합류하지 못했고, 이후 유림은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는 별도의 운동을 전개함.

파리장서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