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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2월의 기록 9건

일자가 있는 기록은 날짜순으로,
월까지만 알려진 기록은 마지막에 모았습니다.

현재 9건 표시

08 · 토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이 일본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조선청년독립단 이름으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 집회에는 약 600명이 참석했으며, 선언식 뒤 약 400명이 가두시위를 시도했으나 일본 경찰의 저지와 강제 해산으로 주동자들이 검거됨. 선언서와 관련 문건은 같은 날 일본 정부와 의회, 각국 외교 공관과 언론사 등에 발송되었으며, 국내 독립운동 세력에 자극을 주어 3·1운동 준비를 촉진한 선도적 사건으로 평가.

삼일절 기미독립선언서 이광수 (춘원) 기초

10 · 월

천도교 측 최린의 요청을 받은 최남선이 독립선언서 본문과 함께 파리강화회의 대표들에게 보내는 청원서, 일본 정부에 대한 통고문 등을 1919년 2월 20일 무렵 완성함. 당대의 이름난 문장가였으나 후환을 우려해 민족대표 명단에는 서명하지 않음. 선언서 끝에 붙은 공약 3장의 작성자를 두고는 최남선 단독설과 한용운 관여설이 함께 전해짐.

13 · 목

일본 전권위원 마키노 노부아키가 국제연맹 규약 위원회에 인종 평등 수정안을 정식 제출함. 연맹 회원국 국민인 외국인에게 인종이나 국적을 이유로 법률상·사실상 차별을 두지 않고 평등하고 공정한 대우를 부여하자는 원칙을 제시한 내용. 즉각적인 제도 통일보다는 원칙을 선언하고 구체적 실행을 각국 정부에 맡기는 구상으로 설명했으나 위원회에서 채택되지 못함.

인종 평등 제안 (1919)

14 · 금

인종 평등 조항이 빠진 국제연맹 규약 초안이 예비 강화 회의 본회의에 보고되자 마키노 노부아키가 발언에 나섬. 이날 규약 내용에 대한 토론이 예정되지 않았음을 들어 즉각 논의를 요구하지 않고, 일본 측 제안을 후속 논의 단계에서 다시 제출해 각국 대표의 검토를 요청하겠다는 뜻을 밝힘. 제안을 철회하지 않고 추후 재상정할 방침을 공식화한 것으로, 4월 11일 인종 평등 수정안 재제출로 이어짐.

인종 평등 제안 (1919)

19 · 수

경남 거창에 있던 곽종석의 문인 윤충하가 파리강화회의에 유림 대표 명의의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자고 제안함. 청원 방식은 한국의 독립 의사를 국제 여론에 호소하는 방안으로 설정됨. 유림계의 독립청원 논의가 곽종석을 중심으로 구체화됨.

파리장서운동

25 · 화

이승만과 정한경이 장래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두어 달라는 청원서를 보냄.

1919년 2월 25일, 이승만과 정한경이 대한인국민회 대표 명의로 파리강화회의에 청원서를 작성했음.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에게도 같은 취지의 서한을 보냄. 파리행 여권을 얻지 못한 두 사람은 서면으로 일본의 한국 지배가 부당하다고 호소하고, 장래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 아래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제안했음.

청원은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국제적 보장을 거쳐 독립에 이르겠다는 단계적 외교방안이었음. 그러나 즉각적이고 완전한 독립을 지향하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다른 외부 통치를 스스로 요청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강한 비판을 불렀음. 이승만이 임시정부 지도자로 선출된 뒤에도 위임통치 청원 문제는 그의 지도력과 외교노선을 둘러싼 갈등의 중요한 쟁점으로 남았음.

문서가 작성된 때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전이었음. 청원은 뒤에 세워진 임시정부 명의가 아니라 대한인국민회 대표 명의로 이루어짐. 청원의 내용과 작성 사실은 원문으로 확인되지만, 그것이 현실적인 차선책이었는지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훼손한 선택이었는지는 평가가 갈림.

27 · 목

손병희를 중심으로 한 천도교계가 기독교의 이승훈, 불교의 한용운 등과 손잡아 종교계 연합 전선을 구성함. 천도교 15인·기독교 16인·불교 2인 등 모두 33인이 민족대표로 서명하기로 하고 손병희를 총대표로 추대함. 유림 측의 참여 교섭은 시간이 촉박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함.

기미독립선언서

천도교가 경영하던 보성사 인쇄소에서 사장 이종일이 독립선언서 약 2만 1천 부를 비밀리에 인쇄함. 2월 27일 밤 급박하게 진행되었으며, 인쇄 도중 종로경찰서 형사에게 발각될 뻔한 위기를 넘김. 완성된 인쇄본은 2월 28일부터 3월 1일에 걸쳐 천도교·기독교·불교 조직과 학생들을 통해 전국으로 배포됨.

일자 미상

이광수가 1월 31일 고베를 거쳐 상하이로 건너가 영문 2·8 독립선언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윌슨·클레망소·로이드 조지 등에게 전문으로 보냄. 또한 상하이 영자신문에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을 보도하도록 요청하며 한국의 독립 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리려 한 활동.

이광수 (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