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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의 기록 7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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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연맹 규약을 확정하는 본회의에서 마키노 노부아키가 2월 13일 제출부터 4월 11일 미채택까지의 경위를 정리해 진술하고 원안 조문을 다시 낭독함. 정당한 요구가 승인되지 않은 데 대해 일본 정부와 국민의 통절한 유감을 표명하면서도 이 자리에서 즉시 채택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밝힌 입장. 회의는 같은 날 인종 평등 조항이 없는 국제연맹 규약을 채택함.

인종 평등 제안 (1919)

우드로 윌슨·조르주 클레망소·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와 일본 대표 마키노 노부아키·진다 스테미가 산둥 처리안을 협의함. 일본이 산둥의 중국 주권을 반환하되 독일의 경제적 권리와 칭다오 거류지 관련 권리를 승계한다는 방침을 확인하고, 독일의 권리·재산을 일본에 넘기는 조약 조항을 확정함. 중국의 직접 반환 요구와 충돌한 이 결정이 중국 내 반발과 베르사유 조약 서명 거부로 이어진 전개.

김창숙 등 유림 측은 상하이에서 파리장서를 영문으로 번역하고 국문본과 함께 수천 부를 인쇄함. 인쇄본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대표와 각국 공관, 국내 각 향교 등에 발송됨. 파리장서의 내용이 해외 외교 관계자와 국내 유림 사회에 함께 전달되면서 독립청원운동의 범위가 확대됨.

파리장서운동 김규식 (우사) 파리 전달 대상

3·1운동 뒤 독립운동 열기의 고조와 입학생 증가로 기존 합니하 시설의 수용 한계가 커지자, 유하현 제3구 고산자 하동 대두자로 이전·개교하고 신흥무관학교로 개칭.

고산자 학교를 본교로 삼고 합니하 학교는 분교로 운영. 장교반 6개월·하사관반 3개월·특별훈련반 1개월의 단기 군사교육과정을 편성하며 독립군 양성 체제 정비. 윤기섭이 교감, 이세영이 교장을 맡고 성준용·원병상·이범석 등이 교관으로 참여.

신흥무관학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총장 겸 파리 주재위원인 김규식, 「한국 독립에 관한 청원서」와 「한국 독립 항고서」를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 『한국 독립과 평화』를 비롯한 홍보 문서도 각국 대표와 언론에 배포하며 일제 식민 지배의 실상과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알림. 한국 문제가 강화 회의의 정식 의제로 채택되지는 못했으나,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한국인의 독립 요구를 국제사회에 전달한 대표적인 외교 활동.

김규식 (우사)

3·1운동 이후 안창호가 대한인국민회 원동위원 자격으로 상하이에 도착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함. 연통제와 교통국 설치, 독립운동 세력의 임시정부 통합 등을 추진하며 임시정부의 조직 기반을 정비함.

안창호

프랭크 다이슨이 조직하고 아서 에딩턴·찰스 데이비슨 등이 참여한 영국 원정대가 프린시페와 브라질 소브랄에서 개기일식을 관측해 태양 근처 별빛의 편향을 측정함. 세 관측 자료 중 두 자료가 일반 상대성이론의 예측과 부합했고 한 자료는 초점 문제로 신뢰도가 낮다고 판단한 결과. 1919년 11월 공동학회 발표 뒤 일반 상대성이론과 아인슈타인이 세계적 주목을 받은 검증 사건.

일반 상대성이론

신흥중학교가 고산자로 이전해 신흥무관학교로 개편된 뒤,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지청천이 연성대장으로, 윈난강무학교 출신 이범석·러시아군 장교 출신 김경천 등이 교관으로 참여.

장교·하사관 양성 과정에서 전술·병학·지휘 교육을 담당하며 학교의 군사교육 체계 강화. 지청천은 이후 교성대장을 거쳐 서로군정서 사령관으로 활동.

이범석의 신흥무관학교 교관 활동은 1919년 10월에도 확인됨.

신흥무관학교
06-28 · 토 milestone 조인된 대독 강화조약

연합국과 독일, 베르사유 조약 서명

1919년 6월 28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독일과 연합국 대표들이 제1차 세계대전의 대독 강화조약인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한 사건. 조약은 독일의 영토 상실과 군비 제한, 배상 책임 등을 규정하고 국제연맹 창설을 위한 틀을 마련함.

사라예보 암살 사건이 발생한 지 정확히 5년 뒤에 이루어진 조인. 유럽의 전후 질서를 재편했으나 독일 내부의 강한 반발과 국제적 갈등을 낳음. 조약의 서명일은 1919년 6월 28일, 발효일은 1920년 1월 10일로 구별됨.

인종 평등 제안 (1919)

1919년 1월 18일 개막한 파리 강화 회의, 한국 독립 문제를 정식 의제로 다루지 않은 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 체결과 함께 폐막. 김규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독립 청원서와 항고서를 제출하고 각국 대표단에 한국 문제의 의제 상정을 요청했으나, 승전국 일본의 방해와 열강의 외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음. 민족자결주의가 승전국의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는 선택적 원칙이라는 한계가 드러났으며,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도 큰 타격을 받음.

김규식 (우사)

1919년 6월 28일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에 정식 취임함. 연통제와 교통국을 조직하고 《독립신문》 발행을 주도하며 통합 임시정부 수립을 이끎. 초기 임시정부 운영의 실질적 중심 역할.

안창호

유림의 독립청원운동은 1919년 2월 19일 윤충하가 곽종석에게 파리강화회의 독립청원을 제안한 뒤 6월경까지 약 4개월 동안 전개됨. 3·1독립선언의 민족대표에 유림 인사가 참여하지 못한 상황과 일부 유림 명의의 독립불원서에 대한 반발 등이 독자적인 청원운동을 추진하는 배경으로 작용함. 파리장서운동은 유림이 조직적으로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 의사를 호소한 운동으로, 이후 전개된 유림계 독립운동과 구분해 제1차 유림단운동으로도 불림.

파리장서운동

1919년 8월 2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이 상하이 프랑스 조계 동익리에서 창간. 이광수가 사장 겸 주필을 맡고, 주요한·이영렬 등이 발간과 운영에 참여함. 상하이 망명 지사들이 국내외 소식과 독립운동 관련 기사를 싣던 등사판 신문 《우리 소식》을 발전시킨 매체로, 민족사상 고취와 독립운동 소식의 국내외 전파를 발간 목표로 제시함.

독립신문 상하이판 이광수 (춘원) 초대 사장 겸 주필

파리에서의 외교 활동을 마친 김규식이 미국 워싱턴에 도착해 구미위원부 초대 위원장으로 활동. 미국 정부와 정치인들을 상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고,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독립공채 자금을 모집해 임시정부에 전달.

김규식 (우사)

이승만이 집정관총재 명의의 공포문으로 구미위원부를 설치했음. 구미 각국을 상대로 독립 외교와 선전, 자금 모집을 수행하기 위한 기관이었음.

1919년 8월 25일, 이승만은 집정관총재 공포문 제2호에 따라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했음.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라는 지위에 근거한 조치였으며, 파리에서 독립 외교를 펼친 김규식이 위원장을 맡음. 이 조직은 한국의 독립과 임시정부의 존재를 미국과 유럽에 알리는 외교 창구로 활동했음.

구미위원부는 미국 정부와 의회에 청원하고, 간행물과 강연을 통해 일본의 식민통치를 비판했으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음. 미국의 여론과 정책에 영향을 미쳐 한국 문제를 국제정치의 의제로 만들려는 이승만의 외교독립 노선이 조직 형태를 갖춘 것임.

한편 구미위원부의 설치 절차와 운영, 미주에서 모인 재정의 처리 문제는 상하이 임시정부와 갈등을 일으켰음. 1925년 이승만 면직 뒤 임시정부는 폐지를 결정했으나 이승만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활동을 계속했음. 이후 1941년 설치된 주미외교위원부는 임시정부가 공포한 별도 규정에 근거한 기관이었음.

이승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