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보, 3·1운동을 ‘소요사건’으로 보도
매일신보가 1919년 3월 7일 3·1운동 관련 보도를 내며 이를 ‘소요사건’으로 다룸. 당시 전국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운동의 상황을 일부 전하면서도, 운동의 의미를 깎아내리고 총독부 기관지의 시각으로 해석. 조선어 유일 일간지였던 매일신보가 식민 통치의 선전 매체로 기능한 사례.
매일신보가 1919년 3월 7일 3·1운동 관련 보도를 내며 이를 ‘소요사건’으로 다룸. 당시 전국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운동의 상황을 일부 전하면서도, 운동의 의미를 깎아내리고 총독부 기관지의 시각으로 해석. 조선어 유일 일간지였던 매일신보가 식민 통치의 선전 매체로 기능한 사례.
신한청년당이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한 한국 대표로서 1919년 2월 1일 상하이를 출발해 3월 13일 파리에 도착. 파리 샤토당 거리 38번지에 평화회의 한국민대표관을 설치하고 파리한국통신부를 운영하며 한국 독립을 알리기 위한 외교·홍보 활동에 착수. 회의 참석 자격이 정부 대표로 제한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상하이에 임시정부 수립과 대표 신임장 발급을 요청함.
김창숙은 경상남도 거창의 곽종석 거처를 찾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는 계획과 문안을 협의함. 장석영과 김황이 각각 작성한 초안을 검토하고 김황의 문안을 바탕으로 외교 활동에 활용하기 적합하도록 새로운 청원서를 작성함. 곽종석은 수정된 독립청원서와 서명자 명단을 김창숙에게 건네고 해외 이동을 위한 여비와 연락망 마련을 지원함.
1919년 2월 1일 발표한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문창범 등이 중심이 되어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설립한 첫 임시정부.
김창숙은 유림 대표 137명의 서명이 담긴 파리장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전달하기 위해 3월 23일 밤 경성역을 떠나 중국으로 향함.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청원서와 여비는 김창숙이 직접 소지하지 않고 중국 상점 동순태를 통해 봉천 지점으로 미리 보냈으며, 김창숙은 이동 중 봉천에서 이를 인수함. 파리강화회의를 상대로 유림의 독립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해외 활동이 실행 단계에 들어감.
김창숙은 안동·봉천·천진·제남·남경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해 이시영·조성환·신채호·조완구·신규식 등과 파리장서 제출 방안을 논의함. 당초 직접 파리로 향하려 했으나 김규식이 이미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위해 상하이를 떠난 사실을 확인하고 파리행을 포기함. 이후 파리장서를 영문으로 번역·인쇄해 파리강화회의와 각국 외교 관계자 등에 우편으로 보내고, 김창숙은 상하이에 남아 대중국 외교 활동을 벌이기로 결정함.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가 평양·진남포·의주 등 북부 도시를 거쳐 전국 거의 모든 군으로 번지며 약 두 달간 이어짐. 학생·농민·노동자·상인 등 각계각층이 참여했고, 만주·연해주·미주 등 국외 한인 사회로도 시위가 확산됨. 신분과 지역을 넘어선 거족적 항쟁으로,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으로 기록됨.
영남유림과 호서유림이 별도로 추진하던 독립청원 운동을 통합하고 양측 청원서의 서명자 명단을 합쳐 유림 137인 명의의 파리장서를 완성함. 문안은 김황이 작성한 초안을 바탕으로 곽종석과 김창숙 등이 수정한 독립청원서를 채택함. 김창숙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유림 대표로 정하고, 호서유림의 임석후에게 국내외 연락 임무를 맡김.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이 고향인 충남 천안 병천(아우내) 장터에서 조인원·유중권 등과 함께 수천 명이 참여한 대규모 만세 시위를 주도함. 일제 헌병의 발포로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해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다수가 부상함. 유관순은 주동자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 이듬해 옥중에서 순국, 3·1운동을 상징하는 인물로 남음.
성주읍 장날을 맞아 유림과 기독교계 인사, 주민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함. 파리장서 서명자 이봉희를 비롯한 지역 인사들도 시위를 주도했으며, 일제 경찰은 참가자들을 체포하고 강하게 탄압함. 이후 주도자들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유림이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낸 사실이 드러나면서 파리장서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로 이어짐.
일제 경찰은 4월 2일 성주 만세운동을 탄압하고 주도자들을 체포·취조하는 과정에서 유림이 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려 한 사실을 알아냄. 송우선·송훈익·송문근 등이 붙잡히면서 파리장서운동의 존재가 일제에 드러났고, 이후 서명자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됨. 성주 지역을 비롯해 곽종석 등 파리장서운동 관련 유림에 대한 체포와 투옥으로 탄압이 확대됨.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1회 회의에서 파리에 체류하던 김규식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 겸 파리 주재위원으로 선임. 임시정부는 4월 13일 외무총장 임명장과 파리 강화 회의 전권대사 신임장을 전보로 발송. 김규식은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공식 외교관의 자격으로 파리에서 독립 외교를 전개함.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미국에 있던 이승만이 국무총리로 선출됨.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선출했음. 전날 시작된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내세운 임시헌장을 채택한 결과였음. 당시 이승만은 미국에 있었으므로 상하이 현장에서 정부 수립 회의를 주도하거나 곧바로 현지에 부임한 것은 아니었음.
임시헌장은 국민의 평등과 여러 자유, 선거권과 피선거권, 교육·납세·병역의 의무 등을 규정했음. 이승만의 선출은 미국을 무대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를 신생 임시정부의 지도부에 포함시킨 결정이었음. 이때의 직책은 국무총리였고,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은 같은 해 9월 여러 임시정부 계통의 통합과 정부 조직 개편을 추진하는 과정에서였음.
3·1운동을 계기로 상하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사건. 4월 10일 밤부터 11일까지 이어진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담은 임시헌장 10개 조를 채택한 결정.
신분·성별 등의 차별 없는 평등, 신앙·언론·거주 등의 자유와 선거에 관한 권리를 규정하고, 국무총리 이승만을 비롯한 국무원을 구성한 정부 수립. 군주 중심의 국가에서 벗어나 국민을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세우려 한 헌정 구상.
임시헌장은 1948년 제헌헌법과 별개의 문서이지만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민주공화제의 역사적 토대. 현행 헌법 전문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하는 헌정사의 출발점.
파리 강화 회의 국제연맹 규약 위원회에서 마키노 노부아키가 인종이나 국적에 따른 차별 없이 외국인을 평등하게 대우한다는 내용의 수정안을 재제출함. 출석 위원 17명 가운데 11명의 찬성을 확보했으나, 의장 우드로 윌슨이 강한 반대가 존재하는 중요 사안에는 만장일치가 필요하다고 판정하면서 채택되지 못함.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빌리 휴즈는 제안이 백호주의 이민정책을 위협할 것으로 보고 영국 대표단 등에 지속적으로 반대 압력을 행사함. 다수의 지지를 얻고도 국제연맹 규약에 인종 평등 원칙을 포함시키는 데 실패한 결정적 사건이 됨.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립과 함께 이미 파리에서 독립외교 활동을 벌이던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의 대한민국 대표로 임명함. 김규식은 앞서 2월 1일 상하이를 떠나 3월 13일 파리에 도착해 한국공보국을 설치하고 각국 대표와 언론을 상대로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알리고 있었음. 임시정부의 공식 대표 자격을 부여받으면서 파리에서 진행되던 독립외교 활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으로 연결됨.
일본군 중위 아리타 도시오가 이끄는 군경이 경기도 화성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에 모아 가둔 뒤 총격을 가하고 불을 질러 학살함. 이 사건으로 28명이 목숨을 잃고 인근 마을을 포함해 30여 채의 집이 불탐. 캐나다인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가 현장을 사진과 기록으로 남겨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린, 3·1운동 탄압의 대표적 참상.
대한민국의 시인 김종문. (~1981년)
서울에서 선포된 임시정부. 당시 일제는 경성이라고 불렀으나 한일병합 이전, 조선시대에는 한성이라 불렸고, 이를 따라 한성정부(漢城政府)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