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9월 2일 오후 6시 긴급 칙령을 통해 도쿄부와 인접 지역에 계엄령 선포. 이후 3일 가나가와현, 4일 사이타마현과 지바현으로 계엄 지역 확대. 치안 유지와 재해 수습을 명분으로 군대가 투입되었으나, 조선인이 폭동과 방화를 일으킨다는 유언비어에 근거한 검문·수색·연행과 군경·자경단의 폭력이 계엄 체제 아래 확산. 국가의 비상조치가 조선인 보호보다 통제와 탄압에 작동하며 학살의 제도적 조건을 형성한 국면.
1923-09-02 매년 이 날 →
1923년 9월 2일
103년 전총 3건
9월 2일 오후부터 3일 사이 일본 내무성 경보국장 고토 후미오 명의의 전보가 전국 지방장관과 조선총독부·대만총독부에 발송. 조선인이 지진을 틈타 각지에서 방화하고 폭탄과 석유를 사용해 불령한 목적을 이루려 한다고 주장하며, 조선인의 행동을 엄밀히 단속하도록 지시한 내용. 확인되지 않은 조선인 폭동설에 정부 기관의 권위를 부여하고 이를 일본 전역과 식민지 통치기관으로 확산한 조치로, 학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보여 주는 핵심 문서.
계엄령 아래 9월 2일부터 6일까지 일본 군대·경찰과 각지에서 조직된 자경단이 관동 지방의 조선인을 대규모로 학살. 군경이 조선인을 검문·연행하거나 직접 살해하고, 죽창·일본도·곤봉·철봉 등으로 무장한 자경단이 발음과 말투 등을 이용해 조선인을 가려낸다며 무차별적인 검문과 살해 자행. 경찰서 등으로 피신한 조선인까지 희생되는 가운데 관헌이 자경단의 폭력을 방조하거나 이에 가담. 중국인과 조선인으로 오인된 일본인도 함께 희생된 사건의 핵심 국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