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명여학교, 3년제 중등과 개교
진명여학교가 보통과 졸업생을 위한 3년제 중등과를 개교. 같은 해 6월 20일 첫 졸업식에서 보통과를 마친 10명이 중등과에 편입하고, 1911년 3월 30일 중등과 첫 졸업생 10명 배출
서울특별시 양천구 목동에 있는 사립 여자고등학교로, 1906년 창성동에서 문을 연 진명여학교의 후신. 순헌황귀비의 교지·재정 후원과 엄준원의 설립·학교 운영, 여메례의 설립 실무 참여를 바탕으로 출발한 근대 여성교육 기관
보통과에서 중등과와 기예과로 교육과정을 넓히며 기초 교과와 외국어·과학·예체능을 함께 가르친 학교. 일제강점기 학생들의 만세운동·항일시위와 1930년대 초 농촌계몽·문자보급 활동이 이어진 여성교육의 현장
광복 뒤 중·고등학교 분리를 거쳐 1987년 중학교를 폐교하고, 1989년 창성동에서 목동의 신축 교사로 이전한 학교. ‘진덕계명’의 뜻을 교명에 담고 나혜석·김명순 등 근대 여성 문화인들의 학업과도 연결된 교육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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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명여학교가 보통과 졸업생을 위한 3년제 중등과를 개교. 같은 해 6월 20일 첫 졸업식에서 보통과를 마친 10명이 중등과에 편입하고, 1911년 3월 30일 중등과 첫 졸업생 10명 배출
진명여학교 보통과가 4년제 진명여자보통학교로, 중등과가 3년제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인가. 초등 단계의 보통교육과 중등 단계의 여자고등보통교육을 함께 운영
진명여학교가 12세 이상 부녀자에게 보통교육과 수예 등을 가르치는 2년제 기예과를 설치. 1922년에는 수업연한 3년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부설 경성여학원으로 개편
진명여자보통학교와 경성여학원을 폐지하고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교육을 집중. 고등보통학교 학급을 4개에서 8개로 늘렸으며, 1931년 5월 말 재학생은 410명
개교 기념행사를 마친 뒤 영휘원으로 향하던 진명여학교 학생들을 태운 전차가 적선동 경복궁 서쪽 굽잇길에서 탈선·전복. 차량에 탄 학생 약 120명 가운데 다수가 중경상
운전사의 급커브 감속 소홀뿐 아니라 만원 운행과 숙련 운전사 부족 등 경성전기회사의 안전관리 문제를 둘러싼 책임 논쟁. 같은 해 여름까지 학생들의 병원 치료와 학부형위원회 활동 지속
해방 이후 새 학제에 따라 진명여자중학교로 교명을 바꾸고 수업연한을 6년으로 확대. 현재의 3년제 중학교와 달리 중등교육 전 과정을 포괄하는 학교 체제로 개편
6년제 진명여자중학교를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나누고 각 과정의 수업연한을 3년으로 조정. 개편 시기는 총동창회의 『진명 100년 인물 100년』에 1950년 6월 1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1951년으로 기록
한국전쟁 중 서울을 떠난 진명여학교가 부산 보수동 2가 68번지의 건물을 임시 교사로 삼아 피난 수업 재개
부산 피난지에서 임시 수업을 이어온 진명여학교가 서울 창성동 본교에서 수복식 거행. 같은 해 6월 8일 폭격으로 삼일당이 파손된 교정으로 복귀
진명여고가 주간 과정에 더해 야간학급을 증설. 야간 교육 규모는 1958년 180명, 1959년 180명, 1960년 165명
진명여자고등학교가 종로구 창성동을 떠나 양천구 목동의 신축 교사로 이전. 앞서 1987년 2월 28일 중학교를 폐교하고 고등학교 단독 체제로 전환
진명여자고등학교가 목동 교정에 교육정보도서관 의석관을 개관. 2005년 당시 3만여 권의 장서를 보유
진명 학생들이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여 항일행동과 동맹휴학에 참여. 배화·중앙보육·정신 등 서울 여러 학교의 학생들도 광주 학생 지원과 일제 규탄에 동참
학생운동의 확산을 막으려는 식민 당국이 같은 날 조기 겨울방학 조치. 시위와 동맹휴학을 억제하기 위해 학교 수업을 앞당겨 중단
1월 14일 가회동에 모인 진명·숙명·이화 등 여학교 대표들이 공동 행동을 논의. 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하고 구속학생 석방과 식민지 교육정책 철폐 등을 요구하며 운동을 준비
1월 16일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숙명·경성여자상업·협성실업 등 여러 학교와 함께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 이튿날 식민 당국의 참가 학교 휴교 조치와 경찰의 학생 검거
여성에게 신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한성부 창성동에서 진명여학교가 개교. 순헌황귀비가 교지를 지원하고 엄준원이 설립을 추진해 초대 교장을 맡았으며, 2년제 보통과에 여학생 70명이 입학
3·1운동 1주년을 맞아 오전 8시 30분 무렵 진명여학교 학생들이 교내에서 독립만세 시위. 배화여학교 등 서울 여학교 학생들이 함께 준비한 기념 시위에 맞춰 동시 행동에 참여
194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이순석이 진명의 교표를 도안. 등대·돛단배·파도와 둘레의 열일곱 광채를 배치하여, 학업으로 세상을 밝히고 굴하지 않고 전진한다는 뜻을 표현
3·1운동과 1920년대 말 항일투쟁에 이어, 1930년대 초 진명 학생들이 농촌계몽과 문자보급 활동에 참여. 학교 밖으로 한글 교육을 넓히려던 당시 학생운동에 동참
덕을 쌓고 학업을 닦아 세상을 밝힌다는 뜻의 교명 ‘진명’. 개교 초기에는 부덕과 근검·정숙을 중시하는 교육방침을 채택했으며, 오늘날의 교훈은 ‘진실·협조·창의’
6·25전쟁 중 폭격으로 파손된 창성동 강당 삼일당을 학교·재단·학부모·졸업생이 협력하여 재건. 이천승이 설계를 맡고 대림산업이 시공에 참여
순헌황귀비가 교지와 학교 운영 재원을 위한 토지인 전장을 지원. 엄준원이 학교 설립과 초대 교장을 맡고, 여메례가 설립 실무에 참여
나혜석이 진명여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뒤 1913년 일본 여자미술학교로 서양화 유학. 유학 중인 1914년 「이상적 부인」, 1918년 소설 「경희」를 발표하며 여성의 삶에 관한 문제를 제기
초기 보통과에서 수신·한문·산술과 재봉·수예·창가·도화를 교육. 1922년에는 영어·일본어·역사·지리·수학·이과·음악·체조까지 포함하여, 가사·수공과 인문·자연과학·예체능 교과를 함께 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