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생존자이자 여성인권운동가 김학순이 중국 만주 지린에서 출생함. 훗날 1991년 국내 거주 피해생존자로서는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하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운동에 나섬.
김학순 (여성운동가)
1924년 중국 지린에서 태어나 1941년 베이징 인근에서 일본군에게 붙잡혀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겪고, 1991년 8월 14일 국내 거주 한국인 피해생존자 가운데 처음으로 실명과 얼굴을 공개해 증언한 대한민국의 여성인권운동가.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대한 국가와 군의 관여를 부인한 데 분노해 오랜 침묵을 깨고 증언에 나선 인물.
김학순의 공개 증언은 사회적 금기 속에 묻혀 있던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를 한국 사회와 국제사회의 역사·인권 의제로 끌어올린 결정적 전환점. 증언 이후 피해 신고와 다른 생존자들의 공개 증언이 잇따랐으며, 같은 해 12월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피해 증언을 법적 책임 추궁으로 확장. 일본 각지의 증언회와 1994년 도쿄지방재판소 법정 증언에도 참여해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과 사죄를 요구함.
한 피해생존자의 증언이 전시 성폭력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과 피해자 운동을 바꾼 상징적 사례로 평가. 김학순이 처음 공개 증언한 8월 14일은 2012년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로 정해졌으며, 대한민국에서도 2017년 국가기념일로 법제화되어 전쟁과 여성 인권을 기억하는 날로 자리매김.
추가 정보
생애
1924년 10월 20일 중국 만주 지린에서 출생.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를 따라 만주 일대를 떠돌았으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와 함께 평양으로 이주. 기생학교를 졸업한 뒤 양아버지와 함께 일자리를 찾아 중국으로 갔다가 1941년 베이징 인근에서 일본군에게 붙잡혀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감.
약 3개월 동안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한 뒤 위안소에 찾아온 한국인 남성에게 데려가 달라고 부탁해 탈출. 중국 각지를 이동하다가 해방을 맞았으며 1946년 귀국. 이후 결혼해 가정을 꾸렸으나 한국전쟁 중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마저 익사 사고로 잃음. 날품팔이·행상·파출부 등으로 생계를 이어 감.
증언과 운동
1990년 6월 6일 일본 노동성이 국회 답변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국가와 군이 관여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히자 분노해 증언을 결심. 1991년 8월 14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통해 국내 거주 한국인 피해생존자 가운데 처음으로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증언함.
김학순의 증언 이후 정대협이 피해 신고전화를 개설하면서 다른 피해생존자들의 신고와 공개 증언이 이어짐. 1991년 12월 6일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일본 정부를 상대로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 청구 소송을 도쿄지방재판소에 제기. 같은 달 일본을 방문해 오사카·고베·도쿄·사카이 등에서 피해 사실과 일본 정부의 책임을 증언함.
1994년 6월 6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린 제9회 구두변론의 원고 본인신문에 출석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직접 진술. 이러한 증언과 소송 활동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국제적인 여성 인권과 전시 성폭력 문제로 확장하고, 일본 정부가 군의 관여를 인정하고 사죄한 1993년 고노 담화가 나오게 된 사회적 흐름에도 영향을 미침.
말년과 유산
건강이 악화된 뒤에도 일본의 증언회와 재판, 집회에 참여하며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배상을 요구함. 1997년 12월 8일 평생 모은 약 2천만 원을 서울 동대문감리교회에 기부하고, 말년에 일본 정부의 진정한 사죄를 받아 달라는 뜻을 남김. 1997년 12월 16일 폐질환으로 별세.
김학순의 공개 증언일을 기려 2012년 12월 10일 제1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8월 14일을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로 지정. 대한민국 국회도 2017년 11월 24일 이날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정하는 법률 개정안을 의결했으며, 2018년부터 국가기념일로 시행함.
타임라인
15평양의 기생 권번에서 교육받은 김학순이 17세 무렵 기생 영업을 위해 양아버지와 함께 중국 베이징으로 감. 베이징의 한 식당에서 일본군에게 붙잡혀 트럭에 실려 간 뒤 베이징 인근 일본군 부대의 위안소에서 성폭력을 강요당함.
약 넉 달 뒤 조선인 상인의 도움으로 위안소에서 탈출함. 이후 중국에서 생활하다가 해방 뒤인 1946년 귀국함.
일본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모토오카 쇼지 사회당 의원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상조사를 요구하자, 시미즈 쓰타오 노동성 직업안정국장이 군과 관계없는 민간업자들이 ‘위안부’를 데리고 다닌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며 정부 차원의 조사가 어렵다고 답변함.
일본 정부와 군의 관여를 부인하고 책임을 민간업자에게 돌린 공식 답변. 일본군에 의해 직접 끌려가 피해를 입었던 김학순은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살아 있는데도 일본 정부가 사실을 부인하는 데 분노하여 공개 증언을 결심함.
김학순이 서울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내 거주 일본군 ‘위안부’ 피해생존자로서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며 피해 사실을 증언함.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위안소에서 겪은 피해를 밝히고 일본 정부에 사실 인정과 사죄를 요구함.
김학순의 증언은 사회적 낙인과 침묵에 가려져 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공적인 역사 문제이자 여성인권 문제로 드러낸 결정적 전환점. 이후 다른 피해생존자들의 신고와 공개 증언,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배상 청구 소송과 국제적 연대 활동으로 이어짐.
이날은 김학순의 증언을 기려 2012년 제1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로 정해졌으며, 대한민국에서는 2017년 법정 국가기념일로 지정됨.
정대협, 김학순 증언 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신고전화 개설
1991년 9월 18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이른바 ‘정신대 신고전화’를 개설함. 김학순의 공개 증언 이후 다른 피해생존자들의 증언과 피해 신고를 접수하기 위해 마련한 창구.
신고전화를 통한 피해 사실의 수집은 개별 증언을 집단적인 피해 조사로 확장하는 계기가 됨. 1992년 2월 29일까지 정대협에 접수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신고자는 70명이며, 이 가운데 당시 생존자는 41명으로 집계됨.
김학순을 비롯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강제동원 피해자·유족 등 35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소송’을 도쿄지방재판소에 제기함. 김학순을 포함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생존자 세 명이 원고단에 참여함.
김학순의 공개 증언이 피해 사실의 고발을 넘어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묻는 소송으로 이어진 사건. 일본군 ‘위안부’ 피해생존자가 일본 법정에서 국가의 책임과 피해 배상을 요구하는 법적 투쟁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됨.
1991년 12월 9일 김학순이 일본 도쿄 한국YMCA에서 열린 ‘김학순 씨의 이야기를 듣는 모임’에 참석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증언함. 수용 인원 300명의 강당에 약 600명의 청중이 모인 증언회.
일본군 ‘위안부’ 피해생존자가 가해국 일본에서 직접 피해 사실을 증언하고 일본 정부의 책임을 고발한 첫 사례. 김학순은 같은 달 오사카·고베·도쿄·사카이 등을 돌며 증언 활동을 이어감.
아사히신문, 일본군의 위안소 관여 입증하는 공문서 보도
1992년 1월 11일 아사히신문이 역사학자 요시미 요시아키가 일본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발견한 일본군 ‘위안부’ 관련 공문서를 보도함. 일본군이 위안소의 설치와 운영, 여성 모집과 감독에 관여했음을 보여주는 자료의 확인.
김학순의 공개 증언과 소송 제기 이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뒷받침하는 공문서가 언론을 통해 제시된 결정적 사건. 일본 정부가 군 관여를 부인하던 기존 입장을 재검토하고 관련 자료를 조사하게 만드는 계기가 됨.
김학순이 한국여성단체연합이 개최한 한국여성대회에서 ‘올해의 여성상’을 수상함.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실명으로 공개 증언하고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한 용기와 활동을 한국 여성운동계가 공식적으로 기린 상훈.
김학순을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침묵을 깨고 사회적 변화를 이끈 여성인권운동가로 조명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여성인권 의제로 확장한 활동의 의미를 확인한 계기.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일본군 ‘위안부’ 관여 인정하고 사죄 담화 발표
고노 요헤이 일본 관방장관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정부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이른바 ‘고노 담화’를 발표함. 담화는 위안소의 설치·관리와 여성들의 이송에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으며, 모집 과정에서도 감언·강압 등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사례가 많았고 관헌이 직접 가담한 사례도 있었다고 인정함.
고노 장관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에 사죄와 반성의 뜻을 밝히고, 역사 연구와 교육을 통해 문제를 기억하겠다고 표명함. 김학순을 비롯한 피해생존자들의 공개 증언과 법적 투쟁, 군 관여 자료의 발견과 시민사회의 진상규명 요구가 일본 정부의 기존 부인 입장을 바꾸는 데 영향을 미친 결과.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대한 군과 관헌의 관여, 모집 과정의 강제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사죄한 핵심 문서. 다만 법적 책임이나 국가배상 의무를 인정한 것은 아니어서 이후에도 책임 인정과 배상을 둘러싼 논쟁이 계속됨.
김학순이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소송’ 제9회 구두변론에 출석해 원고 본인신문을 받음. 후쿠시마 미즈호 변호사의 신문을 통해 성장 과정과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어 겪은 피해를 직접 증언함.
1991년 공개 증언과 소송 제기에 이어 가해국의 법정에서 피해 경험과 일본 정부의 책임을 직접 진술한 사건. 김학순의 증언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공식적인 재판 기록으로 남기고 국가의 법적 책임을 추궁하는 근거가 됨.
김학순이 평생 모은 재산을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용해 달라며 서울 동대문감리교회에 기부함. 기부액은 자료에 따라 약 1,700만 원 또는 2,000여만 원으로 기록됨.
김학순은 임종을 앞두고 일본 정부의 진심 어린 사죄를 받아 달라는 뜻을 남김. 공개 증언 이후 일본 정부에 사실 인정과 사죄·배상을 요구해 온 여성인권운동가로서의 뜻을 마지막까지 이어간 행보.
일본군 ‘위안부’ 피해생존자이자 여성인권운동가 김학순이 73세로 별세함. 1991년 국내 거주 피해생존자 가운데 처음으로 실명 공개 증언에 나서며, 오랫동안 침묵 속에 있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한국 사회와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함.
김학순의 증언은 피해자 개인의 경험을 넘어 전시 성폭력, 식민지 지배 책임, 여성 인권의 문제를 공론화하는 출발점이 됨. 이후 피해생존자들의 추가 증언과 법적·시민사회 운동으로 이어지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의 상징적 기반으로 남음.
아시아연대회의, 8월 14일을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로 지정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제1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참가 단체들이 매년 8월 14일을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로 정하는 결의를 채택함. 국내에서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실명으로 공개 증언한 김학순의 용기와 피해생존자들의 인권운동을 기리기 위한 결정.
이후 피해국과 여러 지역의 시민단체들이 매년 8월 14일 공동행동과 추모·연대 행사를 개최함. 첫 세계 기림일인 2013년 8월 14일에는 여러 국가와 도시에서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요구하는 행사가 동시에 열림.
대한민국에서는 2017년 관련 법률 개정을 통해 8월 14일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라는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고, 2018년부터 정부 주관 기념식을 개최함.
2017년 11월 24일 대한민국 국회가 매년 8월 14일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정하는 법률 개정안을 의결함. 김학순이 국내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실명 공개 증언한 1991년 8월 14일을 기념한 날짜.
법률에 따라 2018년부터 피해자 기림의 날이 국가기념일로 시행됨. 김학순의 공개 증언이 피해생존자들의 명예 회복과 역사교육을 위한 국가적 기억의 날로 제도화된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