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회가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 민중운동으로 확대하기 위해 서울 안국동에서 민중대회를 열기로 했으나, 대회 개최 약 6시간 전 일제 경찰이 신간회 본부를 포위해 준비 중이던 조병옥 등 신간회 회원과 관련 단체 인사들을 대거 검거함.
일제강점기 신간회·흥사단·수양동우회 등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후 미군정청 경무부장·대한민국 내무부장관·국회의원·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지낸 정치인. 미군정기 경찰 최고 책임자로 제주 3·1절 발포사건 이후 총파업 주도자 검거와 경찰 증파, 제주 4·3 강경 진압 논의에 관여함. 한국전쟁 중 내무부장관으로 재직하다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의 책임 문제로 사임함.
추가 정보
조병옥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신간회·흥사단·수양동우회 등에 참여하며 항일운동을 전개함.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확대하기 위한 민중대회 준비에 참여했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됐으며, 수양동우회 사건으로도 투옥됨.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고 미군정 경찰조직의 최고 책임자인 경무부장이 됨. 1947년 제주 총파업 당시 제주에 직접 내려가 파업 주모자 검거를 명령했고, 경찰 증파와 대규모 검속이 이어짐. 1948년 제주 4·3 발발 후에는 현지 최고수뇌회의에 참석해 선무·귀순 중심의 해결 방안을 주장한 김익렬 제9연대장과 충돌하며 강경 진압을 주장함. 제주4·3평화재단은 이를 강경 진압이 본격화되는 전환점으로 설명함.
정부 수립 후 이승만과 결별해 야당 정치에 참여했으나 한국전쟁 발발 뒤 내무부장관으로 다시 입각함. 1951년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의 책임 문제로 사임했으며, 이후 민주당 구파 지도자로 활동함. 1959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으나 미국에서 치료를 받던 중 1960년 사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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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노동자·학생·시민과 경찰의 충돌이 벌어진 뒤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이 경찰 당국이 파악한 사건 경위와 응원경찰 파견 등 대응 상황을 발표함.
제주 3·1절 경찰 발포에 항의해 도내 166개 기관·단체가 참여한 민·관 총파업이 벌어진 가운데 조병옥 경무부장이 제주에 내려옴. 다음날 조병옥이 파업 주모자 검거 명령을 내렸고 전남·전북 응원경찰 222명이 제주에 도착함.
조병옥 경무부장이 제주 3·1절 발포사건과 총파업에 관한 담화에서 경찰의 발포를 정당방위라고 주장하고, 사건이 북조선과의 통모로 발생했다는 취지의 주장을 발표함. 제주4·3평화재단은 이러한 인식과 총파업에 대한 강경 대응이 이후 대규모 검속과 탄압으로 이어졌다고 정리함.
제주에서 돌아온 조병옥 경무부장이 3·1절 발포사건과 관공서 총파업에 관한 경찰 당국의 조사 결과를 발표함. 조병옥은 3월 18일까지 약 150명을 검거해 파업 수습이 진행되고 있다고 밝힘.
4월 3일부터 제주 각지에서 경찰관서 습격 등이 발생한 뒤 조병옥 경무부장이 경찰 당국이 파악한 사태와 피해 상황을 발표함. 제주에 약 480명의 경찰관이 배치되어 있으며 전남에서 응원경찰을 파견했다고 밝힘.
1948년 5월 5일 제주에서 딘 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경비대사령관과 김익렬 제9연대장 등이 참석한 수뇌회의. 딘 일행의 이날 제주 방문은 다음 날 기자회견을 전한 당시 신문 보도로도 확인되는 일정.
공식 진상조사보고서가 인용한 김익렬의 회고에 따르면, 김익렬은 무력에 의한 위압과 선무·귀순공작을 병용하고 무장세력과 일반 주민을 구분하며 경찰을 통합 지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입장. 조병옥의 강경 진압 주장과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에 맞서 몸싸움으로 이어졌다는 구체 경위는 김익렬의 회고 증언.
김익렬은 다음 날 제9연대장직에서 해임되고 박진경 중령으로 교체된 경과. 당시 방문 보도, 당사자의 후대 회고, 공식보고서의 정책 전환 해석을 서로 구분하여 이해해야 하는 사건.
철도경찰 350명과 제6·8관구 경찰관 100명 등 총 450명이 경무부 지령에 따라 제주로 출발함. 제주4·3평화재단은 같은 시기 조병옥 경무부장이 강경 진압 방침을 발표하고 응원경찰을 추가 파견했다고 정리함.
야당의 시국강연회가 장충단공원에서 열리고 조병옥 민주당 최고위원 등이 연설함. 강연 과정에서 집회 방해와 폭력 사태가 발생했으며, 국회는 이후 관련자를 조속히 조사·처단하고 향후 집회 경비를 강화하도록 정부에 건의함.
경성복심법원, 이광수 등에 실형 선고
1940년 8월 경성복심법원이 1심 무죄를 뒤집고 이광수에게 징역 5년, 김동원 등에게 징역 3~4년, 조병옥에게 징역 2년 6월 등 다수 회원에게 실형을 선고. 나머지 다수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음. 검거된 회원들의 전향이 본격화되던 시기의 판결.
조병옥, 미군정 경무부장으로 발령
미군정이 조병옥을 경찰조직의 최고 책임자인 경무부장으로 발령함. 조병옥은 10월 26일 기자회견에서 경찰행정을 새롭게 하고 일제식 압박·위협 경찰을 청산하겠다는 방침을 밝힘.
조병옥, 내무부장관에 임명
한국전쟁 발발 뒤 이승만 대통령이 조병옥을 내무부장관으로 임명함. 조병옥은 경찰과 지방행정을 관할하는 내무부를 지휘하게 됨.
이승만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의 책임을 물어 내무·법무·국방부 장관에게 사임을 요구함. 당시 법무부장관 김준연의 증언에 따르면 조병옥은 김준연과 함께 즉석에서 사임 의사를 밝힘.
1927년 2월 15일 국내에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연합해 좌우합작 단체 신간회를 창립함. 중국 지역 민족유일당운동과 같은 민족협동전선 흐름 속에서 국내판 단일 전선으로 결성. 일제강점기 국내 최대 규모의 합법적 항일운동 단체.
민주당 창당
사사오입 개헌 이후 반이승만 야권 세력이 결집해 민주당을 창당함. 민주국민당을 모체로 흥사단계와 자유당 탈당 의원 등 범야권 세력이 참여했으며, 조병옥은 최고위원으로 당 지도부에 참여함.
조병옥,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지명대회 표결에서 조병옥이 세 표 차이로 승리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됨. 이후 대통령 후보 등록을 마쳤으나 발병해 미국으로 치료를 떠남.
조병옥 사망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등록한 뒤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함. 장례는 1960년 2월 25일 국민장으로 치러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