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차례의 수용시설 운영
나라시노 수용소는 현재의 지바현 나라시노시 히가시나라시노 일대에 있었던 일본 육군 수용시설. 나라시노 연습장과 다카쓰 병영 일대의 시설이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관동대지진이라는 서로 다른 상황에서 수용 목적으로 반복 사용됨.
러시아군 포로수용소(1905~1906)
러일전쟁 중인 1905년 3월 러시아군 포로수용소로 처음 개설됨. 초기에는 건물이 완성되지 않아 포로들이 천막에서 생활했으며, 같은 해 가을 무렵 수용 인원이 약 1만 5천 명에 이름. 강화 뒤인 11월부터 송환이 시작되어 1906년 1월 폐쇄됨. 이후 시설은 나라시노 연습장을 이용하는 일본군 부대의 임시 숙소인 다카쓰 병영으로 전환됨.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군 포로수용소(1915~1920)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칭다오 전투 등에서 포로로 잡은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군 장병을 수용하기 위해 1915년 9월 다시 운영됨. 현재의 히가시나라시노 남동부에 별도 수용시설이 세워졌고, 최대 약 1천 명이 생활함. 포로들은 막사와 정원·채소밭을 만들고 음악·연극·체육 활동을 함.
1918년 일본 농상무성은 독일식 소시지 제조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축산시험장 기사 이이다 요시후사를 수용소에 파견함. 수용 중인 카를 얀 등 독일인 기술자 5명에게 식육가공 시험을 수행하게 하고 제조법을 습득함. 나라시노시 자료는 얀이 처음에는 비법 공개를 주저했으나 수용소장 사이고 도라타로의 설득 뒤 응했다고 전함. 물리적 강제 여부는 확인되지 않지만 포로와 수용 당국의 비대칭적 관계에서 진행된 만큼 자발적인 기술 교류로 단정하기 어려움. 농상무성은 확보한 제조법을 강습회를 통해 일본 각지의 식육가공업자에게 보급함.
1918년 말부터 유행한 인플루엔자로 포로 25명과 수용소장 사이고 도라타로가 사망함. 1919년 12월 석방이 시작되어 마지막 포로가 1920년 1월 26일 떠남.
관동대지진 뒤 조선인·중국인 수용(1923)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직후 조선인이 방화와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가 퍼지고 계엄이 시행된 가운데, 옛 군사시설이 조선인·중국인 집단 수용소로 다시 쓰임. 당시 공식 명칭은 식민지 차별어가 포함된 ‘육군 나라시노 지선인 수용소(陸軍習志野支鮮人収容所)’였음. 9월 4일 설치된 뒤 3,700명이 넘는 조선인·중국인이 ‘보호’ 명목으로 이송된 것으로 연구됨.
수용은 자경단의 공격에서 일부 사람을 격리하는 기능과 함께 조선인을 잠재적 위험집단으로 분류·감시하는 통제 조치로 작동함. 증언과 연구에 따르면 군은 수용자 가운데 일부를 조사·선별해 수용소 안에서 살해했으며, 9월 7일 이후에는 일부 조선인을 다카쓰·오와다신덴·가야타 등 인근 마을에 넘김. 주민 일기와 증언은 인계받은 사람들을 자경단과 주민들이 살해한 경과를 전함.
조사와 추모
공문서에서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던 인계 학살의 실태는 1976년 나라시노시립 제4중학교 향토사연구회의 주민 증언 조사에서 본격적으로 밝혀지기 시작함. 1978년 지역 주민 등을 중심으로 추도·조사실행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증언과 일기를 수집한 조사 성과가 1983년 《이유 없이 살해된 사람들》로 출간됨. 같은 해부터 다카쓰 주민·관음사·실행위원회가 공동으로 합동 위령제를 열기 시작함.
1998년 야치요시 다카쓰의 ‘나기노하라’에서 지역 주민과 조사실행위원회가 조선인 희생자 6명의 유골을 발굴함. 유골은 화장 뒤 이듬해 다카쓰산 관음사에 안치되었고, 1999년 9월 5일 제17회 합동 위령제에서 공동 위령비가 세워짐. 2019년에는 나라시노시가 독일군 포로의 일기·사진·보틀십 등 관련 자료 132점을 시 지정문화재로 지정함. 시민사회의 조사·추모와 지방자치단체의 기록 보존이 서로 다른 수용소의 역사를 현재로 이어가는 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