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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9월 9일 수감자 약 2,200명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애티카 교도소를 장악하고 교도관들을 인질로 잡음. 나흘간의 협상이 결렬되자 록펠러 주지사가 주(州) 경찰의 무력 탈환을 명령, 9월 13일 진압 과정에서 수감자와 인질 등 모두 43명이 사망. 미국 교정사(史) 최악의 유혈 사태로 기록되며 그의 강경 통치를 상징하는 사건.

현직 민주당 주지사 W. 애버렐 해리먼을 50만 표 이상 차로 누르고 뉴욕 주지사에 당선, 이듬해 1월 취임. 민주당 강세 속에서 거둔 승리로 단숨에 전국적 정치인으로 부상. 이후 1962·1966·1970년 세 차례 재선되며 1973년까지 14년간 주정부를 이끈 4선 주지사 시대의 개막.

뉴욕에서 아메리카·아프리카·오세아니아 등지의 토착(원시) 미술을 수집·전시하는 원시미술관(Museum of Primitive Art)을 개관함. 어머니가 공동 설립한 현대미술관(MoMA) 운영과 함께 그의 예술 후원 활동을 대표. 1960년대 말 폐관 후 소장품은 메트로폴리탄미술관으로 이관됨.

아프리카·오세아니아·아메리카 원주민 예술을 중심으로 한 이 미술관은 당시 미국 미술계에서 비서구권 예술을 독립된 미술사적 대상으로 조명하는 중요한 계기가 됨.

제2차 세계대전기 미주(美洲) 관계 조정 업무를 거쳐, 1944년 12월 국무부의 서반구(라틴아메리카) 담당 차관보로 임명됨. 민주당 루스벨트 행정부에서 일한 공화당계 인사로서 미국의 대(對)라틴아메리카 정책을 총괄. 1945년 8월까지 재임하며 평생에 걸친 라틴아메리카 관여의 기반 마련.

스탠더드오일 창업자 존 D. 록펠러의 손자이자 존 D. 록펠러 주니어와 애비 올드리치 록펠러의 6남매 중 셋째로 메인주 바하버에서 태어남.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의 일원으로 성장하며 훗날 정치·자선·예술 후원의 발판이 된 배경 형성. 가문의 부와 공적 활동이 결합된 그의 생애의 출발점.

2018년 12월 1일 화웨이 CFO이자 런정페이의 딸 멍완저우가 미 법무부 요청으로 밴쿠버 공항에서 체포. 미국은 멍과 화웨이가 홍콩 위장회사 스카이콤을 통해 대(對)이란 제재를 위반하고 은행 사기를 저질렀다고 기소. 미·중 기술 갈등을 외교 분쟁으로 비화시킨 사건.

화웨이

1993년 자체 개발한 디지털 전화교환기 C&C08 출시. 재판매에서 연구개발 중심으로 전환한 첫 성과로, 중국 내 베스트셀러가 되며 위상 확보. 루슨트·지멘스·알카텔 등 외국 공급사와 본격 경쟁하는 발판 마련.

8월경 화웨이가 농촌통신 기술·시장 세미나에서 C&C08을 시장에 처음 공개한 것으로 보임.

미국 현지시간 기준 22일, 로버트 스트레이어 미 국무부 부차관보가 화상 브리핑에서 'LG유플러스 같은 기업은 신뢰할 수 없는 공급업체에서 신뢰할 수 있는 업체로 옮기라'며 회사를 콕 집어 압박함.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도 화웨이 장비를 쓰지 않는 SK텔레콤·KT를 '깨끗한 기업'으로 거명. 미·중 기술패권 다툼 한복판에 한국 통신사가 직접 호명된 사건.

런정페이가 투자자 5명과 함께 중국 선전 경제특구에서 약 2만 1천 위안(약 5천 달러)으로 화웨이 테크놀로지를 설립함. 홍콩에서 수입한 전화교환기(PBX)를 호텔·중소기업에 재판매하는 사업으로 출발. 덩샤오핑 개혁개방기 선전에서 등장한 첫 민간 기술기업 중 하나.

각 투자자는 3500위안씩, 총 2만1000위안의 자본금을 출자한 것으로 전해짐. 화웨이 공식 자료는 설립 연도만 1987년으로 밝히지만, 에바 더우의 연구를 인용한 보도에서는 설립일을 9월 15일로 제시함.

문화재청이 2016년 10월 20일 기미독립선언서 관련 문서를 국가등록문화재 제664호로 지정함.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전국적 만세운동의 확산에 기여한 역사적 가치를 공식 인정받음. 한국 근대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기록 문헌으로 보존·관리되는 계기.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으로 자리를 옮긴 가운데,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과 시민 앞에서 정재용이 팔각정 단상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함. 낭독이 끝나자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와 서울의 만세시위가 시작됨. 이 시위를 신호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국 각지로 들불처럼 번진 3·1운동의 출발점.

기미독립선언서

손병희를 중심으로 한 천도교계가 기독교의 이승훈, 불교의 한용운 등과 손잡아 종교계 연합 전선을 구성함. 천도교 15인·기독교 16인·불교 2인 등 모두 33인이 민족대표로 서명하기로 하고 손병희를 총대표로 추대함. 유림 측의 참여 교섭은 시간이 촉박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함.

기미독립선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