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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5954건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최후 진압 작전으로 광주YWCA 건물을 공격하면서, 건물 안에서 마지막 소식지를 제작하던 박용준이 총격으로 사망. 계엄군은 제작 중이던 『민주시민회보』 제10호를 압수했으며, 이에 따라 5월 21일 『투사회보』로 시작된 항쟁 소식지 발행도 종료.

언론 통제 속에서 광주의 상황과 항쟁 지도부의 입장을 시민들에게 전달하던 대안 언론 활동이 계엄군의 무력 진압과 함께 중단.

투사회보

1980년 5월 25일 민주시민학생투쟁위원회 결성과 항쟁 지도부 재편 과정에서 소식지 제작 거점을 광주YWCA로 이전하고, 제호를 『투사회보』에서 『민주시민회보』로 변경. 새 제호로 발행한 첫 소식지는 앞선 『투사회보』 제8호의 호수를 이어받은 제9호로 제작.

제호 변경 뒤에도 들불야학 구성원들을 중심으로 한 제작 체계와 소식지의 기능은 계속 유지. 『민주시민회보』는 항쟁 지도부의 입장과 광주의 상황을 시민들에게 전달하며 5월 26일까지 발행.

투사회보

1980년 5월 21일 녹두서점에 모인 윤상원·정상용·이양현·정현애·김상집 등이 계엄군의 진압과 광주의 참상을 알릴 소식지 발간에 뜻을 모으고, 윤상원이 이끄는 들불야학팀이 제작을 전담하기로 결정. 윤상원이 들불야학 교사 전용호에게 결정을 전달한 뒤 교사와 학생 10여 명을 모아 『투사회보』 제작 착수.

들불야학 구성원들은 원고 작성과 편집, 등사, 배포 작업을 나누어 수행했으며, 박용준은 철야 등사 작업에 참여. 제작진은 단속을 피해 광천동 일대의 빈집과 들불야학 주변을 옮겨 다니며 소식지를 발행하고 시민들에게 배포. 5월 25일 제9호부터 제호를 『민주시민회보』로 변경한 뒤 5월 26일까지 제작을 이어가며, 언론 통제 속에서 항쟁의 상황과 시민들의 요구를 전달한 주요 대안 정보 통로 역할.

투사회보

대한민국 정부가 법률 제21244호 「간토 대지진 조선인 희생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공포. 국무총리 소속 위원회를 설치해 사건의 경위와 희생 규모, 일본 군·관·민의 개입과 책임, 은폐·왜곡 과정 등을 조사하고 희생자와 유족의 심사 및 명예회복 사업을 추진하도록 규정. 1923년 사건 발생 102년 만에 대한민국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법적 기반 마련. 법률 시행일은 공포 1년 뒤인 2026년 12월 31일.

관동대지진 100주년을 앞두고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이 조선인 학살과 관련해 정부 내부에서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기존 입장 반복. 일본 내각부 중앙방재회의 보고서와 군·사법 당국의 공문서 등 학살을 기록한 자료가 존재하지만, 해당 보고서는 전문가가 작성한 것으로 정부 견해를 나타내지 않는다며 국가 책임과 추가 조사에 선을 그은 태도. 학살 사실을 직접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정부가 인정할 수 있는 기록이 없다는 논리를 통해 공식적인 진상규명과 책임 인정을 회피한다는 비판을 부른 발언.

일본 중앙방재회의 산하 재해교훈 계승에 관한 전문조사회가 『1923 관동대지진 제2편』 보고서를 발간하고, 조선인이 무장봉기하거나 방화한다는 유언비어를 배경으로 자경단과 군대·경찰 일부에 의한 살상 사건이 발생했다고 명시. 군대와 경찰도 9월 3일까지 유언비어에 휩쓸려 이를 증폭했으며, 군 관련 기록에서 조선인 살해 사례가 확인된다고 서술. 일본 정부 산하 기관의 조사 보고서가 관헌과 민간인에 의한 조선인 등 살해 사실을 구체적으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일본 정부가 1923년 11월 15일 현재 관동대지진 이후 발생한 살상 사건 가운데 조선인 사망자를 233명으로 집계. 사법 당국이 기소 대상으로 파악한 사건을 중심으로 산출한 수치로, 일본 군경이 직접 가담했거나 관헌이 방조한 사건, 기소되지 않은 자경단 학살과 은폐된 희생은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집계. 같은 해 『독립신문』이 발표한 6,661명과 큰 차이를 보이며, 이후 피해 규모와 일본 정부의 축소·은폐 책임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 수치.

일본 계엄 당국이 학살이 진정 국면에 접어들던 9월 5일 무렵 지바현의 군사시설에 나라시노 수용소를 설치하고, 관동 각지에서 연행하거나 이송한 조선인들을 이른바 ‘보호’ 명목으로 집단 수용. 자경단의 공격으로부터 일부 조선인을 격리하는 기능과 함께 조선인을 잠재적 위험 집단으로 분류·감시하는 통제 조치로 작동. 수용된 조선인 가운데 일부가 군 당국에 의해 주변 지역 자경단에 넘겨져 살해된 사실도 이후 지역 조사와 증언을 통해 확인.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이 재일 조선인 위문반과 현지 조사원들이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피살자를 총 6,661명으로 집계해 발표. 도쿄 1,781명, 가나가와현 3,999명 등 지역별 희생 규모를 제시한 조사 결과로, 일본 정부가 집계한 233명과 현격한 차이. 시신 인멸과 조사 방해로 정확한 피해 규모 확정에는 한계가 있으나, 현재까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전체 규모를 논할 때 가장 널리 인용되는 당대 조사.

재일 조선인들이 1923년 10월 ‘재일본 관동지방 이재조선동포 위문반’을 조직해 관동 지방의 생존 조선인을 구호하고 학살 피해 조사 착수. 조사원들이 학살 지역을 방문해 희생자 수와 피해 상황을 파악하고 유족과 생존자의 증언을 수집했으나, 시신 은닉과 훼손, 일본 당국의 감시와 조사 방해로 활동에 상당한 제약. 11월까지 이어진 조사가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지역별 희생자 집계에 중요한 토대.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대한민국 국회가 2025년 12월 2일 본회의에서 「간토대학살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가결. 국무총리 소속 간토대학살 진상규명 및 피해자 명예회복위원회를 설치해 학살의 경위와 피해 규모, 일본 정부의 조직적 개입 여부 등을 조사하고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추진하도록 규정. 1923년 학살 발생 102년 만에 대한민국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법적 기반을 마련한 조치.

강덕상자료센터가 재일사학자 강덕상이 수집·보관해 온 일본 정부 공문서 원본을 경향신문에 처음 공개. 1923년 11월 21일 야스코치 아사키치 가나가와현 지사가 소노다 다다히코 내무성 경보국장에게 보낸 ‘지진재해에 따른 조선인과 지나인에 관한 범죄 및 보호상황 기타 조사의 건’으로, 총 54쪽에 걸쳐 가나가와현에서 발생한 조선인 살해 사건과 관련 상황을 보고한 문서. 2023년 복사본이 공개된 뒤에도 관련 기록을 찾지 못했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원본 자료가 확인된 사례.

관동 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100주년을 맞아 도쿄 요코아미초 공원의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앞에서 추도식 개최. 일본 시민과 재일동포 등으로 구성된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 실행위원회가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유언비어와 집단 폭력이 빚은 학살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 것을 호소. 일본 정부와 도쿄도에 학살 사실을 직시하고 책임 있는 역사 인식을 보일 것을 촉구한 100주년 추모 행사.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가 2017년부터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열리는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에 대한 추도문 송부 중단. 고이케 지사는 별도로 열리는 관동대지진 희생자 대법요에서 모든 희생자를 추도한다는 입장을 제시하고, 조선인 학살을 별도로 추도하는 행사에는 메시지를 보내지 않기로 결정. 조선인 학살의 역사적 특수성과 국가·민간의 가해 책임을 흐리고 학살 부정론에 힘을 실어 줄 수 있다는 시민사회와 연구자들의 비판을 부른 조치.

관동 대지진 50주년을 맞아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행사 실행위원회가 도쿄 요코아미초 공원에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건립. 잘못된 선동과 유언비어로 목숨을 잃은 조선인을 추도하고 이러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취지로 조성된 기념물. 이후 매년 9월 1일 추도식이 열리는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기억·추모의 중심 장소로 정착.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헌병 대위 아마카스 마사히코 등 헌병대원이 무정부주의자 오스기 사카에와 여성해방운동가 이토 노에, 오스기의 여섯 살 조카 다치바나 소이치를 연행해 살해한 아마카스 사건 발생. 세 사람의 시신은 헌병대 건물 안 우물에 유기. 관동 대지진 이후의 계엄과 혼란을 이용해 국가가 경계하던 사상운동가와 어린이까지 제거한 관헌 주도의 정치적 살해로, 가메이도 사건 및 조선인 학살과 함께 당시 국가 폭력의 성격을 보여 주는 사건.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지바현 후쿠다무라의 자경단과 주민들이 가가와현에서 온 약품 행상단 15명을 조선인으로 의심해 습격하고, 유아와 임신부를 포함한 9명을 살해한 후쿠다무라 사건 발생. 행상단이 사용하는 사누키 방언과 낯선 말투가 조선인이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킨 가운데, 조선인을 폭도와 범죄자로 지목한 유언비어와 집단적 공포가 일본인에게까지 확장된 학살. 조선인을 살해해도 된다는 인식이 지역사회에 퍼져 있었음을 드러낸 사건.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9월 4일부터 5일에 걸쳐 도쿄 가메이도 경찰서에 구금된 히라사와 게이시치 등 난카쓰노동회 소속 노동운동가 10명이 군경에 의해 살해된 가메이도 사건 발생. 지진과 계엄령으로 조성된 비상 상황을 이용해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세력을 제거한 관헌 주도의 정치적 살해. 조선인을 겨냥한 관민 합동의 대규모 학살과는 피해 대상과 가해 구조에서 차이가 있으나, 관동 대지진 직후 국가 권력이 자행한 일련의 폭력이라는 공통된 역사적 맥락을 지닌 사건.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9월 2일 오후부터 3일 사이 일본 내무성 경보국장 고토 후미오 명의의 전보가 전국 지방장관과 조선총독부·대만총독부에 발송. 조선인이 지진을 틈타 각지에서 방화하고 폭탄과 석유를 사용해 불령한 목적을 이루려 한다고 주장하며, 조선인의 행동을 엄밀히 단속하도록 지시한 내용. 확인되지 않은 조선인 폭동설에 정부 기관의 권위를 부여하고 이를 일본 전역과 식민지 통치기관으로 확산한 조치로, 학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보여 주는 핵심 문서.

계엄령 아래 9월 2일부터 6일까지 일본 군대·경찰과 각지에서 조직된 자경단이 관동 지방의 조선인을 대규모로 학살. 군경이 조선인을 검문·연행하거나 직접 살해하고, 죽창·일본도·곤봉·철봉 등으로 무장한 자경단이 발음과 말투 등을 이용해 조선인을 가려낸다며 무차별적인 검문과 살해 자행. 경찰서 등으로 피신한 조선인까지 희생되는 가운데 관헌이 자경단의 폭력을 방조하거나 이에 가담. 중국인과 조선인으로 오인된 일본인도 함께 희생된 사건의 핵심 국면.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