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결성
야당과 재야·종교계 등이 서울 향린교회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함. 국본은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 철회와 민주헌법 쟁취를 공동 목표로 삼고, 노태우의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일인 6월 10일에 전국적인 국민대회를 열기로 함. 각 분야와 지역의 민주화 요구를 공동행동으로 연결하여 6월항쟁의 조직적 구심점이 된 연합체였음.
6월 민주항쟁은 1987년 6월 대한민국 전역에서 벌어진 대규모 민주화 운동으로, 전두환 정권의 권위주의 통치와 대통령 간선제 유지 시도에 맞서 시민들이 직선제 개헌과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한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 폭로와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이 시민 분노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학생·노동자·종교계·재야 인사뿐 아니라 넥타이 부대로 불린 직장인과 일반 시민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하며 전국적 항쟁으로 확산됨.
항쟁의 직접적 배경에는 1987년 4월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 조치가 있었음. 이는 현행 헌법을 유지한 채 정권 이양을 추진하겠다는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던 사회적 열망을 정면으로 거부한 조치였음. 이에 맞서 6월 10일 국민대회를 시작으로 전국 주요 도시에서 시위가 이어졌고, 경찰의 강경 진압에도 불구하고 시민 참여가 확대되면서 군사정권은 더 이상 기존 방식으로 정국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몰림.
결과적으로 6월 민주항쟁은 1987년 6월 29일 노태우의 6·29 선언을 이끌어냈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제도적 민주화의 출발점이 됨. 이후 노동자 대투쟁, 시민사회 성장, 인권 의식 확대, 선거정치의 재편으로 이어지며 한국 민주주의의 구조를 크게 바꾸었음. 따라서 6월 민주항쟁은 단일한 시위 사건이라기보다, 권위주의 체제에서 시민이 정치의 주체로 등장한 결정적 전환점이자 한국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 기원으로 이해할 수 있음.
1985년 2·12 총선 이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가 커지던 가운데,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사망함. 정부는 이를 단순 쇼크사로 은폐하려 했으나 언론 보도와 검안으로 고문 사실이 드러나며 국민적 공분이 일어남. 4월 13일 전두환이 일체의 개헌 논의를 중단시키는 호헌조치를 발표하면서 저항이 본격화됨.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박종철 사건의 축소·은폐·조작을 폭로하고, 5월 27일 야당·재야·종교계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를 결성함.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피격되어 혼수상태에 빠지자 분노가 절정에 이름. 6월 10일 국본 주최의 국민대회를 시작으로 명동성당 농성, 6·18 최루탄추방대회, 6·26 국민평화대행진으로 이어지며 항쟁이 전국으로 확산됨.
경찰력으로 시위를 막을 수 없고 군 투입도 부담스러웠던 정권은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를 통해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는 6·29 선언을 발표함. 이어 제9차 개헌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했으며, 6월 항쟁은 시민의 힘으로 권위주의 정권을 물러서게 하고 민주주의를 진전시킨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으로 평가됨.
야당과 재야·종교계 등이 서울 향린교회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함. 국본은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 철회와 민주헌법 쟁취를 공동 목표로 삼고, 노태우의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일인 6월 10일에 전국적인 국민대회를 열기로 함. 각 분야와 지역의 민주화 요구를 공동행동으로 연결하여 6월항쟁의 조직적 구심점이 된 연합체였음.
국본이 무차별 최루탄 사용에 항의해 6월 18일 '최루탄추방 국민대회'를 전국에서 개최함. 전국 주요 도시에서 100만 명 이상이 참여했고, 부산에서는 노동자 이태춘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뒤 6월 24일 사망함. 회사원·이른바 넥타이부대까지 가세하며 학생 시위가 시민 항쟁으로 확산된 분수령.
국본이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을 전국 37~38개 시·군에서 동시에 벌임. 100만 명 이상이 참여한 6월 항쟁 최대 규모의 시위로, 대도시뿐 아니라 군 단위 농촌까지 시위가 번짐. 경찰력만으로는 진압이 불가능함이 분명해지며 정권을 6·29 선언으로 내몬 결정적 항쟁.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알려진 뒤 야당과 재야가 함께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박종철군 범국민추도회'를 열고 추도식과 도심 시위를 벌임. 정부의 원천봉쇄에도 서울·부산 등에서 많은 시민이 추도와 항의에 나섬. 흩어져 있던 반정부 세력이 고문 규탄을 고리로 처음 대규모로 결집한 행동.
박종철군 49재에 맞춰 3월 3일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이 전국에서 전개됨. 경찰이 도심 건물 옥상까지 봉쇄했으나 각지에서 시위가 이어졌고, 일부 교도소 양심수들은 단식으로 호응함. 2·7 추도대회와 더불어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저항의 동력을 다진 행진.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6·10국민대회를 앞두고 열린 시위에서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쓰러짐. 중태에 빠진 이한열의 모습은 시위 진압의 폭력성을 드러내며 학생과 시민의 분노를 확대했고, 다음 날 시작되는 전국적 항쟁에 큰 영향을 주었음. 이한열은 7월 5일 사망했으며, 7월 9일 장례에는 대규모 추모 인파가 모여 민주화 요구와 국가폭력에 대한 항의를 이어갔음.
연세대생 이한열, 6월 항쟁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뒤 사망. 장례식에 대규모 추모 인파가 모이며 민주화 열기를 더욱 확산시킴.
6월 민주항쟁 이후 여야 협상으로 마련한 헌법개정안의 국회 의결.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 기본권 보장 강화와 국가권력 통제를 담은 합의안이 국회의 개헌 절차를 통과한 사건.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한을 줄이고 국회의 국정감사권을 되살리며 독립된 헌법재판소를 두는 방향의 개편. 국회 의결만으로 개정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10월 27일 국민투표를 통해 최종 확정하고 10월 29일 공포하는 절차로 이어진 단계.
6월 민주항쟁과 6·29 선언 이후 여야 협상, 10월 12일 국회 의결과 10월 27일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제9차 개정헌법의 공포.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를 채택하고 대통령의 국회해산권과 비상조치권을 없앤 권력구조 개편.
국군의 정치적 중립을 명시하고 국정감사권을 부활시키는 한편, 적법절차와 체포·구속 시 고지, 범죄피해자 구조 등 기본권 보장을 강화한 변화. 전문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4·19 민주이념의 계승을 명시.
제111조에 헌법재판소와 위헌법률·탄핵·정당해산·권한쟁의·헌법소원 심판을 규정하여 헌법을 통한 권력 통제의 기반을 마련한 개편. 부칙에 따라 1988년 2월 25일부터 시행하되 새 헌법에 따른 최초 대통령 선거와 시행 준비를 미리 가능하게 한 이행 규정.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경찰들이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을 불법연행한 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선배 박종운의 행방을 추궁하며 물고문을 가해 사망에 이르게 함. 경찰은 사인을 단순 쇼크사로 설명했으나 언론 취재와 의료진의 소견 등이 고문 의혹을 드러냈음. 사건은 전국적인 추모와 고문 규탄운동을 촉발했으며, 이후 가해 경찰의 범위와 은폐 사실이 추가로 밝혀지면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저항을 증폭시킨 계기가 되었음.
전두환 대통령이 특별담화에서 임기 안의 개헌 논의를 중단하고 기존 제5공화국 헌법에 따른 간접선거로 후임 대통령을 선출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함. 서울올림픽 준비와 정부 이양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야당과 시민사회가 요구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거부한 조치였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분노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각계의 호헌 반대 움직임을 촉발하여 6월 민주항쟁의 주요 배경이 되었음.
1985년 2·12 총선 이후 직선제 개헌 요구가 커지자 여야는 국회 개헌특위를 두고 협상했으나 난항을 거듭함. 전두환은 이를 빌미로 4월 13일 개헌 논의를 빙자한 분열과 혼란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며 임기 중 개헌 유보와 현행 헌법에 의한 정부 이양을 선언함. 직선제를 바라던 국민의 열망에 정면으로 배치된 조치로, 대학교수·종교계·법조계의 잇따른 시국선언과 단식·농성을 촉발함.
1987년 5월 18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함. 김승훈 신부가 낭독한 성명은 경찰이 발표한 고문 가담자가 2명이 아니라 5명이었으며,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과 유정방·박원택 등 대공수사 간부가 사건 축소·조작에 관여했다고 폭로함.
진실은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이부영에게 전달된 뒤, 안유 보안계장과 한재동 교도관, 재야 인사 김정남 등을 거쳐 사제단에 전해짐. 정권이 물고문 사실을 감추고 일부 경찰관만 희생양으로 내세워 사건을 종결하려 했다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확인된 것임.
폭로 직후 박종철 사건은 다시 전국적 쟁점으로 떠오름. 4·13 호헌조치 반대와 고문·은폐 규탄이 결합하면서 6월항쟁으로 이어지는 범국민적 저항이 확대됨.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조작·은폐를 규탄하고 호헌 철폐를 요구하는 국민대회를 개최한 사건.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 주변이 경찰에 봉쇄된 가운데 오후 6시 차량 경적과 흰 손수건 흔들기 등으로 시민들이 동참하고 시위가 전국 주요 도시로 확산된 전환점.
같은 날 집권 민주정의당이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면서 간선제에 따른 정권 승계와 국민의 대통령 직선제 요구가 맞선 상황. 명동성당 농성과 연이은 거리 시위, 6·26 국민평화대행진으로 이어지며 개헌 협상을 이끌어 낸 6월 민주항쟁의 본격적 시작.
민주정의당이 6월 10일 잠실체육관에서 제4차 전당대회 겸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열고 노태우를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함. 같은 날 열린 국본의 6·10 국민대회와 정면으로 대비되며, 정권의 권력 승계 의지를 드러낸 행사. 이후 노태우는 6·29 선언을 거쳐 그해 12월 직선제 대선에서 당선됨.
6월 10일 국민대회 뒤 시위를 벌이던 학생·시민이 경찰에 쫓겨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6월 15일까지 농성을 이어감. 인근 계성여고 학생과 시민들이 도시락·물을 전달하며 지원했고, 사제단의 중재로 6월 15일 오후 자진 해산함. 단발성으로 끝날 뻔한 6·10 국민대회를 지속적 항쟁으로 전환시킨 분기점.
전국적인 6월 민주항쟁 속에서 민주정의당 대표이자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가 시국수습 특별선언을 발표한 사건. 여야 합의에 따른 대통령 직선제 개헌, 선거법 개정, 김대중의 사면복권과 시국사범 석방, 기본권과 언론 자유의 확대 등을 제시한 8개 항의 선언.
직선제 요구를 거부하던 집권세력이 입장을 바꾼 정치적 전환. 7월 1일 전두환의 공개 수용과 여야 개헌 협상을 거쳐 제9차 개정헌법, 12월 대통령 직접선거로 이어진 제도 변화의 계기. 선언 발표 자체와 이후 헌법의 국민투표 확정·공포는 서로 구별되는 단계.
최루탄에 맞아 중태에 빠졌다가 7월 5일 숨진 이한열의 장례가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짐.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영결식에 이어 운구 행렬이 서울시청 앞에 도착하여 시민들과 함께 노제를 진행함.
이후 광주로 이동해 망월동 묘역에 안장됨. 6월 민주항쟁의 희생자를 기리는 대규모 추모 행렬이 서울 도심과 광주를 잇고, 시청 앞 공간이 민주화운동의 기억을 공유하는 장소로 남게 된 사건.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의해 ‘6.10 민주항쟁기념일’을 법정기념일로 제정
6월 항쟁에 참가한 연인원은 약 400~500만 명으로 추산됨. 6·10 국민대회 이후 약 20일간 전국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