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노량 해전

1598년 12월 16일(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 경상도 남해 노량 해역에서 이순신과 명 수군 도독 진린이 이끄는 조·명 연합 수군이 철수 과정의 일본 수군과 벌인 해전. 임진왜란의 마지막 대규모 해전으로, 순천 왜교성에 고립된 고니시 유키나가군의 퇴로를 확보하려던 일본 함대를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으며 전투 과정에서 이순신이 전사한 전투.

6 타임라인
14 관련 링크
노량 해전

추가 정보

1598년 일본군은 정유재란의 전황이 불리해지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뒤 조선에서 철수를 서두르던 상황. 순천 왜교성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 역시 조·명 연합군의 압박을 받으며 퇴로 확보가 필요한 상태였고, 고니시는 사천·남해 등지의 일본군과 연락해 구원을 요청. 이에 시마즈 요시히로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이 고니시군의 철수를 지원하기 위해 노량 해역으로 접근하면서 조·명 연합 수군과의 결전이 형성된 배경.

이순신은 명 수군 도독 진린과 함께 일본 함대의 이동을 차단하기 위해 노량 해역에서 전투를 준비. 1598년 음력 11월 18일 밤부터 19일 새벽 사이 일본 함대가 노량 수로로 진입하자 조·명 연합 수군이 공격에 나섰고, 전투는 노량에서 관음포 일대로 이어지는 격전으로 확대. 조선 수군과 명 수군은 일본 함대에 큰 피해를 입혔으며, 명의 장수 등자룡을 비롯해 조선의 여러 지휘관도 전투 과정에서 전사한 치열한 해전.

전투 막바지 이순신은 관음포 쪽으로 물러나는 일본 함대를 추격하던 중 총탄을 맞아 전사. 전투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자신의 죽음을 즉시 알리지 말라는 취지의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지며, 지휘부는 한동안 그의 전사를 알리지 않은 채 전투를 계속 진행. 이순신의 죽음은 노량 해전을 임진왜란 전체를 상징하는 마지막 장면 가운데 하나로 남게 된 계기.

노량 해전은 일본군의 철수를 처음 결정하게 만든 전투라기보다 이미 진행 중이던 철수 국면에서 벌어진 마지막 대규모 해상 결전이라는 점이 중요. 조·명 연합 수군은 일본 함대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지만 일본군 전체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하지는 못했고, 순천의 고니시군을 포함한 일본군은 이후 조선에서 철수.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서 벌어진 이 전투를 끝으로 조선 해역에서의 대규모 해전도 사실상 종료되었으며,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의 종결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억되는 전투.

타임라인 6건 · 1598

수록 이벤트 분포 점을 선택하면 해당 이벤트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1598년
1598
428년 전 · 6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뒤 일본 지도부가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의 철수를 추진함. 남해안의 일본군이 순차적으로 철수하면서 전쟁은 노량해전을 포함한 최종 철수 단계로 들어감.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뒤 일본의 최고 지도부는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의 철수를 지시. 남해안의 일본군은 각 거점에서 안전하게 빠져나가기 위해 대치하던 명군과 철수 교섭을 진행하기 시작했고, 전쟁의 중심도 공세와 거점 유지에서 철수로 이동.

순천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군 역시 철군을 추진했으나 조선은 일본군의 무사 철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순신은 해상에서 퇴로를 막으려 함. 이러한 철수 정책과 이를 저지하려는 조선 수군의 움직임이 맞물리면서 순천왜성 봉쇄와 노량 해전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전쟁 국면이 형성됨.

1598년 9월 말부터 10월 초 조·명 연합군이 사로병진작전의 일환으로 순천왜성을 육상과 해상에서 압박. 고니시 유키나가군은 철수를 모색했으나 이순신과 진린의 수군이 해상 퇴로를 막으면서 순천 일대에 고립된 상태가 이어짐.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뒤 일본군이 철수 단계로 들어간 가운데, 조·명 연합군은 남해안의 일본군 거점을 동시에 공격하는 사로병진작전을 전개. 순천 방면에서는 명나라 장수 유정과 조선군이 육상에서 순천왜성을 공격하고, 이순신과 명 수군 도독 진린이 이끄는 수군이 해상에서 호응.

순천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군은 육상과 해상 양쪽에서 압박을 받으며 철수를 모색했으나 해상 퇴로가 차단돼 쉽게 빠져나가지 못함. 육상 공격은 결정적인 함락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고니시군의 안전한 철수가 어려워진 상황은 이후 구원 요청과 노량 해전으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군사적 배경이 됨.

노량 해전 전날 밤, 순천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군을 지원하려는 일본 구원함대가 노량 수로와 왜교 일대에 집결. 이순신은 진린과 함께 조·명 연합수군의 진형을 정비하고 일본 함대를 맞을 전투태세에 돌입.

순천왜성에서 퇴로가 막힌 고니시 유키나가는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 등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남해안 각지의 일본 수군이 순천 방면으로 움직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음력 11월 18일 밤 노량 수로와 왜교 일대에 약 500척의 일본 선박이 집결했다고 전함.

이순신은 일본 구원함대가 고니시군의 철수를 지원하며 조·명 연합수군을 협공하려는 움직임으로 판단하고 진린과 함께 진형을 재정비. 약 200척 규모의 조·명 연합수군은 노량 해역에서 일본 함대를 맞을 준비에 들어갔으며, 이어지는 새벽 전투가 노량 해전으로 확대됨.

정확한 시각을 특정할 수 있는 권위 있는 자료는 제한적이므로, 이 사건은 특정 시간대보다 ‘12월 15일 밤 전투태세 돌입’이라는 수준으로 정리.

1598년 12월 16일 이순신과 명 수군 도독 진린이 이끄는 조·명 연합 수군이 노량 해역에서 철수 중인 일본 수군과 벌인 해전. 임진왜란의 마지막 대규모 해전으로 일본 함대에 큰 피해를 입혔으며, 전투 막바지 이순신이 전사.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이후 일본군이 조선에서 철수를 서두르던 가운데, 순천 왜교성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군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일본 수군이 노량 해역으로 이동.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 진린이 지휘하는 명 수군은 일본 함대의 이동을 차단하고 공격하기 위해 노량 일대에서 연합 작전을 전개.

1598년 12월 16일 새벽 조·명 연합 수군과 일본 수군 사이에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으며, 전투는 노량에서 관음포 일대로 이어짐. 연합 수군은 철수하려던 일본 함대를 공격해 상당한 피해를 입혔고, 일본 함대 일부는 전투를 뚫고 빠져나감. 명 수군에서도 등자룡이 전사하는 등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은 격전.

전투 막바지 이순신은 일본 함대를 추격하는 과정에서 총탄을 맞아 전사. 그러나 전투는 계속됐고 조·명 연합 수군은 일본군의 퇴각을 압박. 노량 해전은 일본군 철수 자체를 결정한 전투라기보다 이미 진행 중이던 철수 국면에서 벌어진 마지막 대규모 해상 결전으로, 임진왜란 종결을 상징하는 전투로 남음.

1598년 12월 16일 노량 해전에서 조·명 연합 수군을 지휘하던 이순신이 철수하는 일본 함대를 추격하던 중 총탄을 맞아 전사. 임진왜란의 마지막 대규모 해전 도중 발생한 죽음.

1598년 12월 16일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은 명 수군 도독 진린과 함께 철수하려는 일본 함대를 공격하며 전투를 지휘. 전투가 노량에서 관음포 일대로 이어지는 가운데 조·명 연합 수군은 일본 함대에 큰 피해를 입히며 추격전을 계속함.

전투 막바지 이순신은 지휘 중 총탄을 맞아 전사. 그의 죽음은 전투가 끝나기 전에 발생했으며, 지휘부는 전열이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이를 즉시 널리 알리지 않은 것으로 전해짐. 이후 조선 수군은 전투를 이어가 일본 함대의 철수를 압박.

이순신의 전사는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의 마지막 대규모 해전과 겹치며 강한 상징성을 갖게 됨. 노량 해전의 승전과 함께 그의 생애 마지막 전투로 기억되며, 이후 조선에서는 전쟁 수행과 수군 지휘에서의 공적을 기리는 평가가 이어짐.

노량 해전으로 조·명 연합수군과 일본 구원함대가 격전을 벌이는 동안 순천왜성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군이 포위망을 벗어나 철수. 이후 일본군은 부산 방면으로 집결해 조선에서의 철수를 이어감.

노량 해전의 직접적인 목적 가운데 하나는 순천왜성에 고립된 고니시 유키나가군의 해상 철수를 차단하는 것이었음. 그러나 조·명 연합수군이 시마즈 요시히로 등이 이끄는 일본 구원함대와 노량·관음포 일대에서 격전을 벌이는 사이, 고니시군은 순천왜성에서 빠져나갈 기회를 확보.

고니시군은 남해도 남쪽 방면을 거쳐 철수해 시마즈군 등과 함께 부산에 집결. 노량 해전에서 일본 구원함대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고니시군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함.

이 사건은 노량 해전의 승패와 별개로 일본군 전체의 철수가 이미 진행 중이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결과. 순천왜성 주둔군의 철수 이후 일본군은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갔고, 정유재란은 종결 단계에 들어감.

갱신 2026-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