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창간을 위한 박영효 일행의 준비
수신사 박영효가 일본에서 공공기관을 시찰하고 여러 인사와 교류하면서 대중 계몽을 위한 신문 발행을 구상. 후쿠자와 유키치의 추천을 받아 신문 제작을 도울 일본인들을 데리고 귀국. 이후 한성부판윤으로서 신문 간행을 추진하고 유길준에게 협조를 요청하면서 한성순보 창간의 인적·실무적 기반을 마련.
1883년 10월 31일 조선 정부 박문국이 창간한 한문 순보. 국내외 소식과 근대 지식을 전했으며, 갑신정변으로 중단된 뒤 한성주보로 계승된 한국 근대 신문의 출발점.
《한성순보》(漢城旬報)는 조선 정부의 박문국이 1883년 10월 31일(음력 10월 1일) 창간한 한문 신문. 열흘 간격의 발행을 지향한 ‘순보’로, 국내 소식과 외국 정세를 함께 다룬 한국 근대 신문의 출발점.
개항 이후 외교·통상 관계가 확대되면서 관직 인사와 관청 소식 위주인 기존 조보를 넘어 외부 세계의 정보를 전달할 매체가 필요해진 상황. 일본을 방문한 박영효가 신문의 계몽 기능에 주목하여 유길준과 함께 간행을 준비했으나, 박영효의 전임과 유길준의 사직으로 사업이 중단됨. 이후 김만식의 재추진으로 1883년 8월 17일 박문국 설치 결정. 개인의 창간 구상과 정부 조직·인쇄 기반의 형성이 맞물린 근대 신문 출현 과정.
창간사의 핵심은 국내외 정보를 전달하고 외국 문물을 분별하여 수용한다는 취지. 내국기사·각국근사·국내사보 등을 통해 정부 소식과 국제 사건, 정치·법률·과학·기술 지식을 소개. 외신 번역의 비중이 커 현장 취재와 독립적 논평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오늘날의 신문과는 다른 성격.
관청에 배포하는 한편 일반인에게도 구독을 허용한 관영 매체. 다만 한문 해독 능력과 신문값, 제한된 유통망으로 인해 실제 독자층의 확대에는 한계.
1884년 12월 갑신정변 과정에서 박문국의 인쇄 기반이 소실되면서 발행 중단. 1886년 1월 25일 창간된 《한성주보》가 정부의 신문 사업을 계승. 발행 주기를 주간으로 바꾸고 국한문 혼용과 한글 기사도 수록하여, 《한성순보》와 발행 주기·문자 사용에서 차이를 보인 후속 신문.
현존 자료는 창간호부터 1884년 10월 9일자 제36호까지이며, 실제 발행은 그 이후에도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됨. 정확한 종간일과 최종 발행호는 미확인.
서울대학교 소장 《한성순보》는 2012년 10월 17일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 개화기 정보의 유입 경로와 당시 인쇄·편집 방식을 함께 연구할 수 있는 신문 자료.
수록 이벤트가 없는 긴 구간은 빗금 두 개로 접어 표시합니다.
수신사 박영효가 일본에서 공공기관을 시찰하고 여러 인사와 교류하면서 대중 계몽을 위한 신문 발행을 구상. 후쿠자와 유키치의 추천을 받아 신문 제작을 도울 일본인들을 데리고 귀국. 이후 한성부판윤으로서 신문 간행을 추진하고 유길준에게 협조를 요청하면서 한성순보 창간의 인적·실무적 기반을 마련.
조선 정부가 신문과 서적을 간행할 박문국의 설치를 결정한 날로, 음력 고종 20년 7월 15일에 해당. 동문학 장교 김만식이 통리아문의 신문 발행 규정에 근거하여 중단된 사업을 다시 추진. 김인식 등 실무 인력과 일본인 고문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참여하고 저동에 사무실·인쇄소를 마련하여, 그해 한성순보 창간을 뒷받침할 조직과 제작 기반을 구축.
조선 정부의 박문국이 1883년 10월 31일(음력 10월 1일) 《한성순보》를 창간. 열흘마다 발행한다는 의미의 순보로, 한문을 사용하고 정부 소식뿐 아니라 외국 정세와 정치·법률·과학·기술 지식도 소개. 창간사인 「순보서」에서 국내외 정보를 널리 전하고 외국 문물을 분별하여 수용한다는 취지를 제시. 관청 배포와 일반인 구독을 함께 운영했으나, 한문 해독 능력과 비용·유통망의 제약 속에 독자 확대에는 한계.
박영효가 한성부판윤에서 물러나 광주유수로 옮겨가고, 신문 준비를 돕던 유길준도 사직하면서 한성부의 간행 계획 중단. 유길준이 신문국 장정과 창간사 등을 마련하던 단계에서 추진 인력이 흩어진 상황. 일본인 협력자들도 이노우에 가쿠고로를 제외하고 귀국했으며, 이후 김만식이 통리아문을 중심으로 사업을 다시 추진.
현존하는 한성순보 가운데 마지막 호수인 제36호 발행. 창간호부터 이 호까지 남은 지면은 국내 관청 소식과 번역 외신을 함께 전했던 개화기 신문의 편집과 내용을 보여주는 자료. 실제 발행은 이후에도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최종 발행호는 미확인.
갑신정변 과정에서 박문국 사옥과 활자·인쇄시설이 소실되면서 한성순보 발행 중단. 창간 약 1년 만에 신문 제작의 물적 기반을 잃은 사건으로, 정치적 격변이 정부의 정보·출판 사업에 직접 영향을 준 사례. 이후 인쇄시설과 인력을 다시 갖추어 1886년 한성주보로 신문 간행을 재개.
한성순보가 중단된 뒤 재건된 박문국에서 《한성주보》를 창간하여 정부의 신문 간행 사업을 계승. 열흘 간격의 순보에서 주간 발행으로 전환하고, 순한문 위주의 지면에 국한문 혼용과 한글 기사를 함께 수록. 상공업 종사자의 구독과 광고 참여도 장려하여 독자층 확대를 시도. 이후 재정난과 신문대금 미납 등이 겹치면서 1888년 7월 발행 종료.
서울대학교 소장 한성순보의 국가등록문화유산 등록.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이 관리하는 신문 자료로, 등록 대상의 제작 시기는 1883년 10월 31일부터 1884년 10월 9일까지. 국내외 정세와 개화 지식을 전달한 초기 근대 신문의 지면을 보존한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