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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
주제

국채보상운동

National Debt Redemption Movement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대한제국기 경제적 국권회복운동. 일본에서 도입한 차관 원금 1,150만 원과 이자를 합친 약 1,300만 원을 국민 의연금으로 갚아 재정 예속을 막고 국권을 지키려 함.

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 특별회에서 서상돈이 국채 보상을 제안하고 김광제 등 회원들이 호응하면서 시작됨. 담배를 끊어 아낀 돈을 모으는 단연(斷煙)을 핵심 실천 방안으로 제시했고, 2월 21일 《대한매일신보》에 취지서가 게재된 뒤 전국으로 확산됨. 여성·학생·상인·노동자·백정·승려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함.

통감부의 언론·지도부 탄압과 분산된 조직 구조, 회계 관리 논란 속에서 1908년 무렵 동력을 잃었고 목표액을 달성하지 못함. 남은 의연금을 교육사업에 쓰려는 시도도 병합 뒤 좌절됨. 운동 관련 기록물 2,475건은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됨.

11 타임라인
2 사실

추가 정보

배경과 목표

러일전쟁 전후 일본은 대한제국에 차관 도입을 확대함. 1905년 화폐정리사업과 정부 부채 정리, 금융 경색 완화 등을 명목으로 650만 원이 도입되었고, 1906년에는 시설 개선과 산업 개발 등을 명목으로 500만 원이 추가됨. 이 원금 1,150만 원과 이자를 합친 약 1,300만 원은 당시 대한제국의 한 해 세입에 가까운 규모였음. 국채보상운동은 이 부채를 국민의 힘으로 상환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재정 의존을 줄이고 국권을 지키려는 시도였음.

참여 방식과 언론의 역할

발기인들은 약 2,000만 명이 3개월 동안 담배를 끊고 매달 20전씩 모으면 목표액을 마련할 수 있다고 제안함. 이후 절식, 반찬 수 줄이기, 패물과 생활용품 기부 등으로 참여 방식이 확대됨. 여성·학생·상인·노동자·인력거꾼·백정·승려·기생 등 사회 각계각층이 지역별·직업별 단체를 만들어 의연금을 모음.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제국신문》·《만세보》 등은 취지문과 논설, 의연자 명단과 금액을 지속적으로 게재함. 특히 《대한매일신보》는 의연자가 많을 때 별도 부록까지 발행하며 모금의 공개성과 전국적 확산을 뒷받침함.

좌절과 의연금 처리

운동은 1907년 중반까지 빠르게 확산되었으나 전국 조직을 통합하는 지휘체계가 약했고 모금액의 보관·감독을 둘러싼 논란도 발생함. 통감부는 운동의 중심 언론인이던 배설을 영국 법정에 세우고 양기탁에게 횡령 혐의를 씌워 구속함. 양기탁은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지도부에 대한 불신과 조직 분열이 이미 확산되어 운동은 동력을 회복하지 못함.

1909년 국채보상금처리회가 조직되어 남은 의연금을 교육사업에 활용하는 방안을 논의했고, 1910년 4월 토지를 매입해 그 수익을 교육비에 쓰기로 결의함. 그러나 병합 뒤 계획은 무산됨. 1910년 12월 보도에 따르면 교육기본금관리회가 관리하던 9만여 원과 국채보상금총합소 관계자들이 관리하던 4만 2,000원이 총감부와 경무총감부의 관리로 이전됨.

역사적 의미와 기록유산

목표액을 갚는 데는 실패했으나, 국가적 위기에 시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언론이 모금 내역을 공개한 전국적 국민 모금운동이라는 의미를 남김. 이후 외환위기 당시 금모으기운동을 설명할 때 역사적 선례로 거듭 소환됨.

취지서·의연자 명단·신문 기사·통감부 문서 등 2,475건으로 이루어진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운동의 발의와 확산, 탄압과 사후 처리 과정을 함께 보여주는 자료임.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됨.

타임라인

11
1907 5건
119년 전

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에서 문회명을 대동광문회로 바꾸기 위한 특별회가 열림. 부사장 서상돈이 일본에 대한 국채 1,300만 원을 국민의 힘으로 갚자고 제안하고, 사장 김광제 등 참석자들이 호응함. 김광제는 담뱃대와 담배쌈지를 버리고 3개월치 담뱃값 60전과 별도 의연금 10원을 내놓았으며, 참석자들이 즉석에서 약 2,000원을 모금함. 전국으로 확산된 국채보상운동의 출발점.

《대한매일신보》가 1907년 2월 21일 「국채일천삼백만원보상취지」를 가장 먼저 게재한 뒤 기사·논설·기고와 의연금 광고를 통해 운동을 지속적으로 알림. 의연자가 급증하자 지면을 확대하고, 명단을 모두 싣지 못할 때에는 별도 부록을 발행해 성명과 금액을 공개함. 언론을 통한 공개 모금이 대구에서 시작된 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핵심 기반이 됨.

1907년 2월 21일 김광제와 서상돈 등이 작성한 「국채일천삼백만원보상취지」가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됨. 대한제국 국민 약 2,000만 명이 3개월 동안 담배를 끊고 매달 20전씩 모아 일본에 대한 국채 1,300만 원을 갚자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제시함. 대구에서 시작된 제안이 신문을 통해 전국에 알려지고 각지의 단연회와 국채보상단체 결성으로 이어지는 계기.

1907년 2월 22일 서울에서 김성희·유문상·오영근 등이 국채보상기성회를 조직하고 취지서와 회칙을 마련함. 국민 의연금을 모아 일본에 대한 국채 1,300만 원을 갚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서점·약국·《대한매일신보》사·잡지사 등을 의연금을 받는 수전소로 지정함. 서울에 모금·보관 체계가 마련되면서 각 지역과 계층의 국채보상 조직 결성이 확산됨.

1907년 3월 15일 서울 대안동 국채보상부인회가 《대한매일신보》에 취지서를 게재하고 전국 여성의 참여를 호소함. 여성도 국가의 혜택을 받는 백성으로서 국채 보상에 참여해야 한다고 밝히고, 신분과 관계없이 의연금을 낸 사람을 회원으로 인정함. 이후 각지에서 부인감찬회·패물폐지부인회·탈환회 등 여성 단체가 조직되고 패물과 생활비를 절약한 돈을 기부하면서 운동의 참여 기반이 확대됨.

1908 3건
118년 전

1908년 6월 18일 서울 영국총영사관에서 열린 영국 법정이 《대한매일신보》 발행인 배설에게 금고 3주와 6개월간의 선행 보증을 선고함. 통감부가 배설의 항일 언론 활동과 국채보상운동 지원을 문제 삼아 영국 사법당국에 처벌과 추방을 요구한 결과임. 배설은 상하이로 이송되어 복역했으며, 운동의 주요 보도·모금 거점이던 《대한매일신보》의 활동도 위축됨.

1908년 7월 12일 통감부가 《대한매일신보》 총무이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 검사원이던 양기탁을 의연금 횡령 혐의로 구속함. 통감부는 배설과 양기탁이 보관 중이던 국채보상금 3만 원을 임의로 소비했다고 주장함. 운동 지도부에 대한 불신을 확산시키고 조직을 분열시킨 이른바 국채보상금소비사건의 시작.

양기탁이 다섯 차례의 공판 끝에 국채보상금 횡령 혐의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음. 1908년 8월 31일 첫 공판이 열린 뒤 검찰도 증거가 부족하다는 취지의 논고를 냈으며, 9월 25일 무죄가 판명됨.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운동 지도부에 대한 불신이 확산되어 국채보상운동은 이미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음.

1910 2건
116년 전

운동 중단 뒤 남은 의연금의 처리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1909년 조직된 국채보상금처리회가 1910년 4월 18일 국민대총회를 개최함. 참가자들은 토지를 매입하고 그 수익을 교육비로 사용하기로 결의함. 국채 상환이라는 당초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국민이 모은 자금을 교육구국사업으로 전환하려 한 시도였으나, 같은 해 병합으로 실행되지 못함.

1910년 12월 15일자 《매일신보》는 교육기본금관리회가 관리하던 국채보상금 9만여 원이 12월 12일 총감부에 납입되고, 국채보상금총합소 관계자들이 관리하던 4만 2,000원이 12월 14일부터 경무총감부 보관으로 이전되었다고 보도함. 교육사업에 사용하려던 계획이 무산되고, 국민이 모은 의연금이 일제 통치기구의 관리 아래 들어간 국채보상운동의 사실상 마지막 단계.

2017 1건
9년 전

2017년 10월 31일 국채보상운동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됨.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운동의 발의·확산·탄압·사후 처리 과정을 보여주는 취지서, 의연자 명단, 신문·잡지 기사, 통감부 문서 등 2,475건이 대상임. 시민의 자발적 모금과 언론을 통한 참여·기록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국제적 보존 가치를 인정받음.

그 외 사실들

기록

  • 운동의 대상이 된 국채 1,300만 원은 일제가 대한제국을 재정적으로 예속시키려 강제로 떠안긴 차관으로, 당시 대한제국 1년 예산에 육박하는 거액.

  • 대구에서 시작해 대한매일신보 등 언론 보도로 전국에 번진, 국민이 스스로 나라 빚을 갚겠다고 나선 한국 최초의 전국적 국민 모금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