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체포된 사람 가운데 하나인 새라 오즈번이 수감 중 사망함. 세일럼의 피해는 사형 집행만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열악한 구금 환경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음.
총독 윌리엄 핍스가 오이어 앤드 터미너 특별법정을 설치함. 식민지 헌장과 통치체제가 바뀌던 혼란 속에서 구금자가 늘었으며, 예비심문 단계의 사건들이 본격적인 형사재판으로 넘어갈 통로가 마련됨.
특별법정이 브리짓 비숍의 사건부터 심리하기 시작함. 피고인의 형상이 자신을 해쳤다는 이른바 ‘유령 증거’가 재판에 들어왔고, 피고인이 반박하기 어려운 주장에 법적 권위가 부여됨.
브리짓 비숍이 교수형에 처해짐. 처음 내려진 사형판결이 실제 집행으로 이어졌으며, 이후 세 차례의 집단 교수형까지 합쳐 19명이 같은 방식으로 목숨을 잃었음.
김만중 사망
조선의 소설가 김만중. (1637년~)
리베카 너스·새라 굿·엘리자베스 하우·수재나 마틴·새라 와일즈가 교수형에 처해짐. 고발 대상은 사회적으로 주변화된 사람들에 한정되지 않았으며, 공동체 안에서 존중받던 사람도 보호받지 못했음.
목사 조지 버로스, 존 프록터, 조지 제이컵스, 존 윌러드, 마사 캐리어가 교수형에 처해짐.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도 마녀 혐의의 희생자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집행이었음.
자일스 코리가 유무죄 답변을 거부하자 몸 위에 무거운 돌을 올리는 강제 절차가 시행되었고, 끝내 사망함. 유죄판결 뒤 교수형을 받은 사례와 구분해야 하며, 재판 절차 자체가 치명적인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드러냄.
마사 코리·메리 이스티 등 8명이 교수형에 처해짐. 이로써 네 차례의 교수형으로 희생된 사람은 모두 19명이 되었으며, 이날이 세일럼 마녀재판에서 마지막으로 교수형이 집행된 날이었음. 이후 특별법정 해산과 남은 사건의 재심리가 이어졌음.
총독 윌리엄 핍스가 오이어 앤드 터미너 법정을 해산함. 다만 법정의 폐지가 곧 모든 피고인의 석방이나 마녀 범죄 개념의 폐지를 뜻하지는 않았으며, 남은 사건들은 새 법원에서 다루게 되었음.
새 상급법원이 세일럼에서 처음 개정함. 신뢰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유령 증거를 배척했으며, 주 대법원 연혁에 따르면 심리한 26명 가운데 23명이 무죄를 받았고 나머지 3명도 뒤에 총독의 사면을 받았음.
프랑스의 작가 라파예트 부인. (1634년~)
남은 수감자들이 석방되면서 대규모 재판이 마무리됨. 그러나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도 가족의 죽음과 구금 비용, 평판의 손상이라는 문제가 남았으며, 석방과 명예회복은 서로 다른 과정이었음.
프랑수아 케네 출생
프랑스의 경제학자 프랑수아 케네. (~1774년)
공적인 금식과 기도의 날에 새뮤얼 시월이 회중 앞에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함. 재판의 권위가 무너진 뒤 판사 개인이 잘못을 돌아본 사례였으나, 사과만으로 피해자의 법적 지위가 복구된 것은 아니었음.
아베 프레보 출생
프랑스의 소설가 아베 프레보. (~1763년)
장 라신 사망
프랑스의 작가 장 라신. (163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