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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12년 10월 28일 콘스탄티누스 1세의 군대가 로마 북쪽 테베레강 밀비우스 다리 부근에서 막센티우스의 군대를 격파. 패배한 막센티우스는 퇴각 과정에서 강에 빠져 사망했고, 콘스탄티누스는 다음 날 로마에 입성하여 서로마 지역의 지배권을 굳힘. 전투 전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의 상징과 관련된 환시를 보았다는 이야기는 후대 기독교 문헌에 전해지며, 전투 자체의 군사적 사실과 종교적 전승을 구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음. 날짜는 당대의 율리우스력에 따른 관행적 역사 표기임.

371년 10월 백제 근초고왕이 태자 근구수와 함께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함. 고구려 고국원왕은 전투 중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됨.

국왕이 적의 공격으로 전사하면서 고구려는 대외전략의 위기에 놓였고 소수림왕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오름. 백제가 4세기 후반 북방으로 세력을 확대하며 고구려와 경쟁한 상황을 보여주는 사건.

372년(소수림왕 2) 전진의 부견이 사신과 승려 순도를 고구려에 보내 불상과 경전을 전함. 소수림왕은 사절을 맞이하고 답례 사신을 보내는 등 외교적 교류를 이어감.

《삼국사기》에서 확인되는 고구려 최초의 공식적인 불교 전래 기록이며, 왕실이 새로운 종교와 사상체계를 활용해 통치기반을 다지는 출발점. 실제 민간 신앙의 시작 시점과 국가적 수용 기록은 구분해야 함.

372년 소수림왕이 국가 교육기관 태학을 세워 자제들을 교육하도록 함. 태학은 문헌에 나타나는 한국 최초의 관학으로, 유교 경전과 행정에 필요한 학문을 가르쳤을 것으로 추정됨.

고구려의 통치가 귀족세력의 연합을 넘어 관료와 제도를 중심으로 정비되는 과정에서 의미를 지님. 학생 구성과 세부 교육과정은 확인된 사료가 제한적이므로 단정하지 않음.

373년(소수림왕 3) 고구려가 처음으로 율령을 반포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됨. 구체적 조문은 전하지 않지만 국왕을 중심으로 법질서와 국가운영 체계를 정비한 조치로 해석됨.

372년 불교 수용과 태학 설치에 이은 중앙집권화의 핵심 단계. 고구려의 법제 발전과 귀족세력의 통합, 왕권 강화 과정을 보여줌.

384년(침류왕 원년) 동진에서 승려 마라난타가 백제에 도착하자 침류왕이 그를 맞아 궁중에 머물도록 하고 불교를 받아들임. 이듬해에는 불교 사원을 세우고 승려를 배출했다는 기록이 전함.

고구려의 372년 불교 수용과 비교해 볼 수 있는 백제의 공식적 불교 전래 사건. 불교가 왕실과 중국 남조 간 문화·외교 교류를 매개했음을 보여줌.

396년 광개토대왕이 군대를 이끌고 백제의 도성을 공격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았다고 광개토왕릉비 등에 기록됨. 비문에는 58성·700촌 확보라는 수치가 제시됨.

다만 58성·700촌은 그해 단일 원정만의 성과가 아니라 광개토왕 재위기 백제 전쟁의 누적 결과일 수 있다는 해석이 있으므로 구분함. 백제·고구려 관계의 주도권이 고구려로 넘어간 결정적 사건.

광개토왕릉비에 따르면 400년 고구려가 신라의 지원 요청에 응해 군사를 남쪽으로 보내 왜군 등과 교전함. 비문은 고구려군이 신라의 수도를 거쳐 가야 지역 인근까지 진격한 내용을 담고 있음.

이 사건은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 확대와 가야·왜 등 남부 세력의 관계 변화를 설명하는 중요한 사례. 전투 당사자·진격 경로와 결과의 해석에는 비문 판독 및 역사학계의 논쟁이 존재하므로 고구려측 기록이라는 점을 명시함.

414년 고구려 장수왕이 광개토왕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을 건립함. 비문에는 건국 전승과 왕실 계보, 광개토왕의 활동,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과 관리 규정이 함께 새겨졌음.

이는 고구려인이 직접 남긴 당대 기록인 동시에 왕실의 정당성과 선왕의 공적을 강조한 기념물이었음. 따라서 기록에 담긴 사실을 살피는 일과 그것을 서술한 왕실의 관점을 해석하는 일을 함께 수행해야 함.

광개토왕릉비

427년 고구려 장수왕이 압록강 유역의 국내성에서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김. 확장된 영토를 통치하고 기존 귀족세력의 영향력을 조정하는 정치적 선택이자 남쪽의 백제·신라와의 관계에 영향을 준 조치.

천도의 구체적인 경위와 원인은 기록이 제한적이며, 남진 전략과 농업·교통 기반 및 왕권 강화 등 여러 요인이 제시됨. 이후 고구려의 한강 유역 진출과 475년 한성 함락을 이해하는 중요한 선행 사건.

433년 백제 비유왕이 신라 눌지마립간에게 화친을 요청하고 신라가 이를 받아들였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됨. 두 나라는 고구려의 남방 진출과 압력에 대응해 교류 및 협력을 늘려 감.

흔히 나제동맹의 중요한 계기로 설명되지만 정식 군사동맹의 성립 시점은 433년 혹은 455년 전후로 보는 견해가 있어, 433년의 사료 기록인 화친 제안·수락을 우선해 기록함.

동로마 제국 비티니아의 칼케돈에서 제4차 보편 공의회가 개막함. 에우티케스 논쟁을 비롯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교리 문제와 교회 규율·관할권을 다루며 이후 기독교 교리와 교회 분화에 장기적 영향을 남긴 회의의 시작.

475년 9월 고구려 장수왕이 약 3만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 수도 한성을 공격해 함락함. 백제 개로왕이 사망하고 많은 주민이 포로로 끌려가는 등 백제 왕실과 수도권은 치명적 피해를 입음.

한성의 상실은 백제의 한강 유역 지배와 기존 정치질서가 무너진 결정적인 전환점. 왕자 문주가 신라로부터 원군을 요청해 돌아왔지만 수도는 이미 함락된 뒤였으며, 백제는 그해 웅진 천도를 단행함.

475년 10월 문주왕이 고구려에 함락된 한성을 떠나 웅진(현재의 공주)으로 백제의 도읍을 옮김. 산과 금강을 끼고 방어하기 유리한 입지였으나 새 수도에서는 왕권 약화와 귀족세력 재편이라는 과제가 나타남.

한성백제에서 웅진백제로 넘어간 체제 전환의 핵심 사건. 고구려의 남진과 신라와의 외교 관계, 이후 무령왕의 재정비와 성왕의 사비천도로 이어지는 변화의 출발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