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개혁의 일환으로 공적 역법을 태양력으로 바꾸고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삼아 새 역법을 시행함. 동시에 건양 연호를 사용해 조선의 독자 연호를 세움. 국제적 시간 체계를 수용한 근대적 제도 개편이었으나, 같은 시기 강행된 단발령은 격렬한 반발을 부름.
김홍집 내각이 공포 당시 예고한 전국 시행일이 도래함. 태양력과 건양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날이기도 했으며, 관리·군인·경찰에게 단발을 요구하고 민간으로 집행을 확대함.
황현의 기록에는 순검들이 길을 막고 사람들의 머리를 자르는 모습이 나타남. 단발을 단순한 권고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강제적 상황이었으며, 상투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반발과 일상생활의 혼란으로 이어졌음.
서울의 프랑스 외교관 르페브르가 본국에 단발령의 공포와 시행 상황을 보고함. 관리·경찰·군인은 단발을 받아들이거나 직책을 그만두어야 했으며, 이에 반대한 학부대신이 사임했다고 기록함.
르페브르는 서울에서 단발이 예상보다 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판단함. 이는 당시 외교관이 수도에서 관찰하고 해석한 내용으로, 지방의 저항이나 전국적 수용 정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통계는 아님. 강제 집행과 의병 항쟁을 전하는 다른 기록들과 함께 읽으면 관찰 위치에 따라 상황 인식이 달랐음을 알 수 있음.
김명순이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
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 작가 연보에 기록된 생일은 1896년 1월 20일
고종과 왕세자가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김. 을미사변 이후 왕의 신변이 위협받던 상황에서 이루어진 이동으로, 건청궁은 왕실의 주요 거처 기능을 잃게 됨.
의병 진압을 위해 중앙 병력이 지방으로 이동한 가운데 이루어진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무너짐. 이후 새 정부는 민심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단발을 개인의 선택에 맡기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꿈. 왕의 거처 이동은 단발령의 강제 시행이 끝나는 정치적 전환점이었음.
청일전쟁(1894)으로 중국인 인부들이 돌아가고 재정난까지 겹쳐 공사가 지체되던 중, 설계·감독을 맡은 코스트 신부가 벽체 공사가 끝나갈 무렵인 1896년 2월 선종함. 뒤를 이어 프와넬 신부가 감독을 맡아 내부 공사를 속행함. 설계자의 죽음에도 공사가 멈추지 않고 완공까지 이어진 전환점.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무너진 뒤 새 정부가 단발의 강제 시행을 거두고 머리 모양을 개인의 의사에 맡기도록 함. 반발을 누그러뜨리고 민심을 수습하려는 정책 전환이었음.
강제가 철회되었다고 해서 단발한 사람들이 모두 상투로 돌아가거나 서양식 머리 모양의 확산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음. 이후에도 직업과 지역에 따라 상투와 짧은 머리가 공존했으며, 대한제국기에는 특정 공직 집단을 대상으로 단발을 다시 요구함.
미국의 정치인 토머스 마이클 홀트. (1831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남. 이후 학교 교육과 해외 유학을 통해 서양화가와 작가로 활동하며 여성의 삶과 권리를 공론화했음.
미국의 언론인 찰스 다우가 최초로 다우 존스 산업평균지수(DJIA)를 발표.
- 초기 구성: 제너럴 일렉트릭(GE)을 포함한 당시 미국 경제를 대표하는 12개의 철도 및 산업 기업의 주가를 산술 평균하여 산출
- 발표 배경: 투자자 에드워드 존스와 함께 월스트리트 저널을 창간한 찰스 다우는 복잡한 주식 시장의 흐름을 대중이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고안
이상정 (독립운동가) 출생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이상정. (~1947년)
갑오개혁의 연장선에서 1896년 9월 1일 칙령 제61호 「호구조사규칙」이 공포되어, 열 집을 하나의 통으로 묶고 문산에 능하며 행실이 단정한 사람을 통수로 삼는 십가작통 편제가 도입됨. 이틀 뒤 내부령 제8호 「호구조사세칙」이 뒤따르며 근대적 호적제도의 틀 마련. 다섯 집을 한 통으로 삼아 온 조선의 오가작통 체제가 사실상 막을 내린 분기점.
록펠러, 스탠더드 오일의 일상 경영에서 은퇴
존 D. 록펠러가 스탠더드 오일의 일상적 경영에서 물러나 자선사업에 점차 집중. 사장 직함과 지분은 유지했지만 실제 경영을 맡던 시기와 구분되는 은퇴로, 이후 반독점 소송과 분할은 후임 경영진 아래 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