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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12월의 기록 7건

일자가 있는 기록은 날짜순으로,
월까지만 알려진 기록은 마지막에 모았습니다.

현재 7건 표시

01 · 수

미국·영국·중국이 일본에 대한 전쟁 목적과 전후 처리 방향을 담은 카이로 공동성명을 공개한 일. 일본이 1914년 이후 차지한 태평양 섬들의 박탈, 만주·타이완·펑후 제도의 중화민국 반환, 폭력과 탐욕으로 빼앗은 다른 영토에서의 일본 축출, 한국의 장래 자유와 독립을 제시한 선언.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얻을 때까지 전쟁을 계속한다는 의지의 표명. 한국 독립의 정확한 시한이나 독도 등 개별 섬의 경계를 명시한 문서는 아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카이로 선언

02 · 목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서처가 공보 호외를 발행하여 카이로 회담의 한국 독립 관련 선언을 알린 일. 12월 1일 공개된 국제적 약속을 이튿날 임시정부의 공식 간행물로 전달한 신속한 대응. 한국의 장래가 연합국의 공동성명에 포함된 사실을 독립운동 진영에 전하는 계기.

카이로 선언

03 · 금

충칭의 대공보가 조소앙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장의 카이로 선언 관련 성명을 보도한 일. 한국 독립에 대한 약속을 환영하고 세 나라에 감사하면서, 임시정부의 즉각적인 승인과 한국 측에 대한 무기대여 원조 적용을 요구한 내용. 독립 원칙의 공표를 실제 정부 승인과 대일전 참전 지원으로 이어가려 한 외교적 대응.

카이로 선언

05 · 일

김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 충칭에서 기자들에게 일본 패망과 동시에 한국이 독립해야 한다고 밝힌 성명. 카이로 선언의 한국 독립 약속 가운데 ‘in due course’라는 시점 표현에 반대하고, 한국인이 스스로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있으며 어떠한 국제 지배도 원하지 않는다고 강조한 내용. 한국의 자주적 독립 요구와 연합국의 유보적인 표현 사이의 긴장을 드러낸 대응.

카이로 선언

07 · 화

매일신보가 1943년 12월 7일 「지원 안한 학도 징용, 5일 훈련소에 일제히 입소」 기사를 게재함. 학도지원병제에 응하지 않은 조선인 학생들이 징용 대상으로 처리되는 상황을 보도. ‘지원’이라는 형식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관헌의 압력과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조선인 학생들을 침략전쟁에 동원한 국면에서 학병 지원자를 진정한 국민으로, 미지원자를 비국민, 낙오자로 대비시키며 학병 동원 담론을 만들어낸 것으로 분석됨.

매일신보

08 · 수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감 중이던 국어학자 이윤재가 함흥형무소 미결감에서 고문과 추위·굶주림 끝에 순국함. 한글 보급 운동과 조선어사전 편찬에 평생을 바친 학자로, 사전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옥중에서 생을 마침. 조선어학회 사건의 비극을 상징하는 죽음.

09 · 목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카이로 선언의 한국 독립 약속에 대한 감사를 거듭 전한 일. 한국인들의 연합군 협력 의지와 대일전 참여 계획을 설명하고 미국의 지원 및 전략사무국 관계자의 지속적인 협조를 요청한 내용. 선언의 정치적 약속을 실제 군사 협력으로 발전시키려 한 미주 외교 활동.

카이로 선언 이승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