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학회
일제강점기 한국어와 한글을 연구·보존·보급하기 위해 활동한 대표적인 민간 학술단체. 1921년 조선어연구회로 출발해 1931년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국어 문법 정리, 한글 맞춤법 통일, 표준어 사정, 사전 편찬 등 한국어의 근대적 체계를 세우는 작업을 주도함.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 조선어가 공적 영역에서 밀려나던 시기에, 언어를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라 민족의 기억과 정체성을 지키는 기반으로 보았던 단체.
조선어학회의 핵심 성과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표준어 정리, 《조선말 큰사전》 편찬 사업으로 이어짐. 특히 《조선말 큰사전》은 한국어 어휘를 체계적으로 모아 정리하려는 대규모 지식 사업이었으며, 이는 해방 이후 국어사전 편찬과 국어 정책의 중요한 토대가 됨. 학회에는 이극로, 최현배, 이윤재, 한징, 장지영 등 국어학자와 한글운동가들이 참여해 한국어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대중적으로 보급하는 역할을 수행함.
조선어학회는 1942년 일제가 회원들을 대거 체포·투옥한 조선어학회 사건을 통해 한국어 보존 운동이 식민지 권력에 의해 얼마나 정치적인 저항으로 인식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존재가 됨. 이 사건은 언어 연구와 사전 편찬이 단순한 학술 활동을 넘어, 민족문화와 독립 의식을 지키는 행위였음을 드러냄. 따라서 조선어학회는 한국어의 근대화와 한글의 공공적 위상을 세운 학술단체이자, 일제강점기 문화적 저항의 핵심 축으로 이해할 수 있음.
타임라인
20휴면 상태에 빠졌던 학회(한글모)를 임경재·최두선·이승규 등이 모여 '조선어연구회'라는 이름으로 다시 일으킴. 주시경 사후 끊어질 뻔한 국어 연구의 맥을 제자들이 이은 것으로, 한글 철자법 연구와 동인지 발간을 중심으로 활동함. 오늘날 조선어학회·한글학회로 이어지는 조직의 직접적 재출발점.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가 신민사(新民社)와 공동으로 훈민정음 반포 제8 회갑(480년)이 되던 1926년 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로 정하고 기념식을 가짐
1929년 1월 귀국한 이극로가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맡아 우리말 연구와 보급의 한복판에 섬. 조선어사전 편찬과 한글 규범화 작업을 이끌며 흩어진 말과 글을 바로 세우는 일에 매진. 식민지 한글운동을 조직적으로 이끈 지도자로 자리 잡음.
한글날 기념식에서 100여 명에 이르는 각계 인사의 발기로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고 우리말 사전 편찬에 착수함. 신명균·이극로·이윤재·이중화·최현배가 집행위원으로, 이극로·이윤재·한징 등이 편찬원으로 선정됨. 28년 뒤 『큰사전』 완간으로 결실을 맺는 대장정의 출발점.
총회 결의에 따라 학회 이름을 '조선어학회'로 고침. '조선어문의 연구와 통일'을 내걸고 사전 편찬과 어문 규범 제정 사업을 본격 추진하는 체제로 개편됨. 일제강점기 국어 운동의 중심 기관이 된 이름.
1927년 동인지로 펴내던 《한글》을 학회 기관지로 다시 창간함. 국어학 연구 논문과 한글 보급 자료를 싣는 학술지로 자리 잡았으며, 2020년 기준 통권 327호까지 이어짐. 우리말 연구 성과를 쌓아 온 대표적 어학 학술지.
약 3년의 제정 작업과 1년의 수정을 거친 통일안을 10월 19일 임시총회에서 확정하고, 10월 29일 한글날 기념식에서 발표함. 한국어 정서법의 근간을 처음으로 통일한 규정. 오늘날 한글 맞춤법의 직접적 토대.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를 두어 1935년 1월부터 1936년 8월까지 표준말 사정을 끝내고 한글날에 공표함. 전국에서 두루 통할 표준어의 기준을 처음으로 체계화한 작업. 사전 편찬과 국어 교육의 바탕이 됨.
외국 인명·지명 표기를 통일하기 위한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1940년 6월 7일 최종 확정하고 발표(공표), 1941년 1월 간행함. 맞춤법 통일안 제정에 착수할 때부터 준비해 온 작업으로, 맞춤법·표준어와 함께 어문 3대 규범을 완성함. 『큰사전』의 외래어 표기 기준으로 쓰임.
일제가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하고 10월 1일 이중화·장지영·최현배 등 11명을 시작으로 회원과 후원자들을 잇달아 검거함. 1943년 4월까지 33명이 붙잡혀 치안유지법 내란죄로 몰렸고, 사전 편찬 원고와 서적은 모두 압수됨. 학회 활동과 『큰사전』 편찬이 전면 중단된 일제 말기의 대표적 민족 탄압 사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감 중이던 국어학자 이윤재가 함흥형무소 미결감에서 고문과 추위·굶주림 끝에 순국함. 한글 보급 운동과 조선어사전 편찬에 평생을 바친 학자로, 사전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옥중에서 생을 마침. 조선어학회 사건의 비극을 상징하는 죽음.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위원 한징이 함흥형무소에서 옥사함. 언론인 출신으로 1930년 조선어학회에 가입해 사전 편찬과 표준어 사정에 헌신한 인물. 이윤재에 이은 두 번째 옥중 순국으로,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이 빚은 희생.
1944년 12월부터 9차례 이어진 공판 끝에 이극로 징역 6년, 최현배 징역 4년, 이희승 징역 2년 6개월, 정인승·정태진 징역 2년 등을 선고함. 사전 편찬을 민족운동의 형태로 규정한 예심 결정에 따라 치안유지법 내란죄가 적용됨. 학문 활동 자체를 독립운동으로 처벌한 판결.
상고가 8월 13일 기각되었으나 이틀 뒤 광복을 맞아 8월 17일 이극로·최현배·이희승·정인승 4명이 풀려남. 석방된 회원들은 곧바로 학회를 재건하고 한글날 행사를 되살림. 중단되었던 우리말 사전 편찬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계기.
조선어학회 사건의 재판 증빙 자료로 경성고등법원에 보내졌던 사전 원고가 경성역(지금의 서울역) 화물 창고에서 발견됨. 10여 년에 걸친 어휘 수집과 집필의 결실이 사라질 뻔하다 극적으로 돌아온 것. 이 원고를 바탕으로 『큰사전』 간행이 재개되었으며, 원고는 뒷날 국가지정기록물 제4호로 지정됨.
한글날에 맞춰 『조선말 큰사전』 1권을 펴냄. 1929년 편찬회 조직 이후 18년 만에 나온 첫 결실로, 우리 민족의 손으로 만든 첫 한국어 대사전의 출발. 이후 1949년 2권이 이어지고 학회 개칭 뒤 『큰사전』이라는 이름으로 완간됨.
광복 뒤 정기총회 결의로 학회 이름을 '한글학회'로 바꿈. 1908년 국어연구학회에서 출발해 배달말글몯음·한글모·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로 이어진 이름이 오늘의 한글학회로 정착됨. 이후 한글 전용 운동과 우리말 사전 편찬 등 우리 말글 진흥 사업을 이어감.
한글날에 마지막 6권을 펴내며 『큰사전』 편찬 사업을 마무리함.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 조직 이후 조선어학회 사건과 6·25 전쟁을 견뎌낸 28년 만의 완간으로, 총 16만 4125개 어휘 수록. 민족의 손으로 완성한 첫 한국어 대사전.
그 외 사실들
기록
주시경과 김정진 등 당대의 지식인들이 세운 민족학회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학술단체로 평가됨. 1908년 국어연구학회로 출발해 배달말글몯음·한글모·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를 거쳐 한글학회로 이어짐.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글학회는 오랫동안 기원을 1921년 조선어연구회 창립으로 잡아 1971년 '창립 50돌', 1981년 '창립 60돌' 행사를 치렀으나, 1987년 정기총회에서 기원을 1908년 국어연구학회 창립으로 고쳐잡기로 결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