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극장 개관
홍순언·배구자 부부가 설립한 동양극장이 1935년 11월 1일 개관. 전속극단 조직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아 배구자악극단을 중심으로 《멍텅구리 2세》, 《월급날》, 무용극 《급수부》와 소녀관현악단 연주 등을 편성. 회전무대와 조명·배경 시설을 갖춘 상설 공연장은 영화관 대관에 의존하던 연극계에 새로운 제작 기반을 제공. 이후 전속작가·연출가·배우를 조직하여 대중극을 지속적으로 공연하는 체제로 발전.
1935년 경성에서 개관한 연극 중심의 공연장. 청춘좌·호화선 등 전속극단과 전문 제작체제를 통해 대중연극·창극의 발전에 기여. 이후 영화관으로 운영되다 1976년 폐관.
동양극장(東洋劇場)은 홍순언과 배구자 부부가 경성 서대문 일대에 세워 1935년 11월 1일 문을 연 연극 중심의 공연장. 전속극단과 작가·연출·무대 제작 인력을 갖추고 지속적으로 작품을 공급한 공연 제작기관.
1930년대에는 극단들이 영화관을 빌려 공연하는 일이 많아 안정적인 무대·공연 일정 확보와 대관료 부담이 주요 과제. 이러한 조건에서 연극을 상설적으로 제작·상연할 기반을 마련한 동양극장의 설립. 창극 공연의 공간도 제공하여 조선성악연구회의 활동을 지원.
회전무대와 무대 배경 시설, 조명을 갖추어 장면 전환과 시각적 효과를 뒷받침한 공연장. 객석 수는 648석 또는 684석으로 전해져 정확한 규모에는 기록의 차이가 있음.
청춘좌 등 전속극단이 극장 공연과 지방 순회를 병행. 배우 월급제를 통해 지속적인 활동 여건을 마련하고 연극 노동의 직업화를 촉진. 동극좌와 희극좌의 통합으로 출범한 호화선도 주요 전속단체로 활동.
공연작의 빈번한 교체를 뒷받침한 자체 문예부와 전속작가 체제. 임선규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등은 관객의 큰 호응을 얻은 대표작. 멜로드라마의 비애와 가족 갈등이 흥행의 중심을 이루었으나, 연출에서는 자연스러운 발성과 사실적인 연기를 추구했다는 평가.
재정 위기와 경영권 변동으로 1939년 8월 운영 중단과 배우 일부의 이탈 발생. 이후 김태윤이 운영을 맡아 공연을 재개하고, 청춘좌와 호화선 중심의 전속체제를 재정비. 1941년 11월 호화선의 성군 개칭.
광복 이후 전속체제가 약화되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영화관으로 사용. 1976년 폐관에 이어 1995년 건물 철거.
관객 취향과 흥행 수입, 전문 인력과 상설 무대를 연결하여 대중연극이 지속될 조건을 마련한 극장. 동시에 수익 압박과 재정 의존으로 운영의 불안정성을 드러낸 상업 공연기관. 연극 중심의 제작체제를 갖추었으나 개관 프로그램에는 무용·음악 등도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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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언·배구자 부부가 설립한 동양극장이 1935년 11월 1일 개관. 전속극단 조직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아 배구자악극단을 중심으로 《멍텅구리 2세》, 《월급날》, 무용극 《급수부》와 소녀관현악단 연주 등을 편성. 회전무대와 조명·배경 시설을 갖춘 상설 공연장은 영화관 대관에 의존하던 연극계에 새로운 제작 기반을 제공. 이후 전속작가·연출가·배우를 조직하여 대중극을 지속적으로 공연하는 체제로 발전.
청춘좌에 이어 조직된 동양극장의 두 번째 전속극단 동극좌가 창립공연을 개최. 변기종·송해천·하지만 등이 중심이 되어 시대극을 주된 공연 분야로 설정. 이후 희극 전문의 희극좌도 조직되었으나 관객의 호응과 흥행에 어려움을 겪었고, 두 단체는 그해 9월 호화선으로 통합.
청춘좌가 1936년 7월 동양극장에서 임선규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초연. 차홍녀가 홍도, 황철이 오빠 철수, 심영이 남편 광호, 한은진이 시누이를 맡아 가족 갈등과 여성의 비극을 무대화. 7월 23일부터 31일까지의 초연 이후 1938년까지 동양극장에서 공식적으로 일곱 차례 재공연될 만큼 큰 인기. 동양극장의 수익과 명성을 높였으며, 1939년 영화화로도 이어진 대표 레퍼토리.
동양극장의 동극좌와 희극좌를 통합하여 호화선 출범. 시대극·희극을 나누어 운영하던 체제에서 관객 취향과 흥행을 고려해 단원을 재편하고 음악부를 보강. 초기에는 레뷰 형식을 시도했으나 점차 청춘좌와 비슷한 대중극 중심으로 전환. 청춘좌와 함께 주요 전속극단으로 자리 잡고 지방 순회공연을 통해 극장 밖 관객층까지 확대.
재정 악화와 경영권 변동 속에 동양극장이 1939년 8월 일시 휴관. 최독견의 경영 중단 이후 청춘좌 단원들은 독자 운영 등을 논의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분산. 황철·차홍녀 등 배우 일부가 새 극단 아랑으로 이동하면서 전속체제에도 변화 발생. 김태윤이 새 운영자로 나서고 잔류 단원과 보충 인력을 중심으로 공연 재개를 추진.
1939년 8월 휴관과 경영권 변동 이후 김태윤이 운영을 맡아 청춘좌·호화선의 합동공연을 마련. 배우 이탈로 약해진 전속체제를 다시 꾸리고, 이후 부설 연극연구소를 통해 신인 배우 양성도 추진. 재개관 이후에는 전속극단 공연과 다른 극단의 대관을 함께 운영하며 극장의 활동을 지속.
동양극장의 전속극단 호화선이 1941년 11월 성군으로 이름을 바꾸어 재출범. 동극좌·희극좌의 통합으로 출발한 단체가 경영권 변화 이후 다시 진용을 정비한 단계. 성군은 청춘좌와 함께 광복 직전까지 동양극장의 주요 전속극단으로 공연을 지속. 이 시기 극장은 다른 단체에 대한 대관도 확대하며 공연 운영방식을 다변화.
영화관으로 사용되던 동양극장이 1976년 영화계 불황 속에 폐관. 1935년 연극 중심의 공연장으로 출발했으나 광복 이후 전속체제가 약해졌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영화 상영으로 운영의 중심이 이동. 연극·창극과 영화 상영을 거친 극장의 영업 종료.
1976년 폐관 후 남아 있던 동양극장 건물이 1995년 철거. 1935년 개관 당시 회전무대와 배경 시설을 갖추고 대중연극의 상설 제작을 뒷받침했던 공연장의 물리적 소멸. 극장 영업이 끝난 뒤에도 존속했던 건물의 마지막 단계.
조선성악연구회가 1936년 2월 9일부터 13일까지 동양극장에서 희창극 《배비장전》을 공연. 정정렬이 작곡에 참여하고 명창들이 배역을 나누어 노래와 연기를 수행한 무대. 익숙한 《춘향전》·《심청전》 외의 작품으로 창극 레퍼토리를 넓히려는 시도였으나, 이후 한 차례 더 공연되었을 뿐 상대적으로 큰 흥행에는 이르지 못함. 판소리 명창의 개인 공연에서 단체 차원의 극 제작으로 활동을 확장하던 시기의 공연.
조선성악연구회가 1936년 9월 자체 제작한 창극 《춘향전》을 동양극장에서 공연. 앞서 청춘좌의 신창극 《춘향전》에 찬조 출연하며 창극의 가능성을 확인한 뒤,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완성한 독자 제작 무대. 명창들이 배역을 나누고 노래와 연기를 결합한 공연으로, 이후 연구회가 제작한 창극 양식의 초기 완성 단계로 평가. 동양극장의 시설과 연기·무대 기술 지원 속에서 판소리가 집단적인 극 형식으로 발전한 사례.
조선성악연구회가 1936년 12월 동양극장에서 4막 8장으로 구성한 창극 《심청전》을 공연. 정정렬과 송만갑 등 판소리 명창이 참여했으며, 긴 판소리 서사를 여러 막과 장으로 나누는 대본 정리가 중요한 제작 과제. 판소리의 인기가 줄어들던 상황에서 익숙한 이야기를 극장 무대로 옮겨 창극을 대중화하고 새로운 관객을 확보하려는 시도. 희극적 요소와 비극적 정서를 함께 구성한 각색으로 평가되지만, 당시 공연 대본은 현재 전하지 않음.